성서는 책이 없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책이다. 바흐나 미켈란젤로가 아니며, 셰익스피어나 샤갈도 아니며, 부누엘, 파솔리니, 스코르세지의 영화도 전혀 아니다. 의미와 진리, 고통과 죽음, 죄와 미래 등에 대한 질문도 아니며 근동이나 우리 자신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혼돈도 아니다.
성서는 역사 혹은 자연과학의 교과서도 아니다. 성서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뚜렷한 흔적과 신뢰할 만한 전승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성서를 단지 정보에 대한 갈증으로만 읽은 사람은 성서의 오류와 모순에 실망할 것이다.
왜 창조에 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보고가 연이어 등장하는가? 왜 인간이 첫 번째 버전에서는 남성의 형상과 여성의 형상으로 등장하고, 두 번째 버전에서는 ?후에 신이 그를 위해 배우자를 만들어주었지만? 아담만 존재하는가? 왜 신은 여러 가지 이름을 지니고 있는가? 여호수아가 태양에 멈추라고 어떻게 명령할 수 있었던가? 예수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 도대체 그는 언제 그리고 어디서 태어났는가?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유대인 혹은 로마 점령군, 아니면 분노한 신인가?
성서는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혹은 빈약하기 그지없는 정보만을 준다. 성서는 역사를 서술한다. 수백 년 동안 구전된 후에 비로소 기술된,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유래한, 모순되는 이해관계로 기술된 역사이다. 이것이 성서를 인간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든다.
성서는 서술 당시의 삶을 묘사한다. 인간의 모습이 어떠했느냐는 질문에 인간은 무엇을 할 능력이 있느냐는 서술로 응답한다. 성서가 인간 심장의 심연을 반영하기에 폭력, 비열함, 거짓 등이 곳곳에 서술된다. 그리고 인간이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점점 더 많은 휴머니티, 폭력의 단념, 화해도 서술된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에서 유혈이 낭자한 정복을 몸소 외쳤던 신이 점점 더 단호하게 폭력의 나선을 부숴버린다.
신화는 동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논리적 사고로 나아가는 순진한 전 단계 이상이다. 신화는 그 자신만의 진리를 담고 있다. 신화는 서술함으로써 현실을 설명한다. 현 상황이 과거에는 어떻게 그 근거를 줬는가? 미래는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
그리고 성서의 신화 한가운데에서 계몽이 시작된다. “너는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출애굽기? 20장 4절)라고 더는 조작할 수 없는 신이 시나이산에서 자기 민족에게 요구한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하는, 자선을 베푸는 존재, 아니면 엄청난 두려움을 주는 존재인 천상의 권력을 그는 이미 창조 과정에서 무장 해제시켰다. 그는 태양, 달, 별을 하늘 천장에 램프처럼 매달았다([창세기] 1장 14절 이하).
이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던 바이에른 방송국 프로그램 [라디오 지식]을 위해 기고했던 원고로 성립되었다. 바이에른 2 방송국 프로그램의 동료들에게 우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 책을 헌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