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역사와 함께 한 인물이었다. 영국 왕 제임스 1세(1603~1625년)~ 찰스 2세(1660~1685년)가 등장하는 시기에 활동했다. 런던 알더만버리에서 목회 한 장로교 목회자이며 신학자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펌브로크 칼리지에서 공부하면서 아르미니우스파로부터 어려움을 당했다.
1617년 제임스 1세는 ‘운동서’(Book of Sports)를 선포하여 주일만 아니라 성일에도 유희와 운동을 즐기도록 했다. 칼러미는 이것을 거절했다. 그 후 평생을 목회하게 되는 런던에 있는 세인트 메리 알더만버리의 목회자가 되었다.
‘장기의회’(1640~1660) 초기에 그는 장로교 정치를 변호했고 감독제도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리처드 백스터와 더불어 아미랄드주의(Amyraldism), 즉 우주적 구속론을 고수하는 자였다. 또 1647년 소교리문답서를 작성하는 위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정책과 찰스1세의 처형을 반대하면서 공화정치 시대에 침묵하며 지냈다. 찰스1세의 ‘왕정복고’시대에 그는 비국교도로 1662년 8월 시행된 ‘대추방’(Great Ejection)으로 축출당했고 런던 대화재의 여파로 힘들어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칼러미는 『이것이 기독교인의 묵상이다』 외에도 여러 작품을 썼다. 『겸손한 저항이라는 책에 대한 답변』(An answer to a Book entitled, An Humble Remonstrance: 1641년), 『영국에 임한 하나님의 무상적 은혜』(Gods free mercy to England, 1642년), 『영국의 겨울』(Englands Looking glasse, 1642년), 『군인의 작은 성경』(Souldier’s Pocket Bible, 1642년), 『복음주의자들의 사역인 하나님의 공의』(Jus Divinum Ministerii Evangelici, 1654년) 등이 있다. 그의 손자(Edmund Calamy, 1671~1732년)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비국교도 역사가이다. 조부처럼 ‘대추방’때 축출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