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곽의동郭衣洞으로, 1920년 하남성 개봉에서 태어났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19세의 나이로 종군했고, 사천성 삼대의 동북대학을 졸업하고 요녕성 심양으로 가서 「동북청년일보」를 맡아 일했다. 1949년 국민당군이 패퇴하자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갔고, 1951년부터 소설을 발표하다 얼마 뒤 대북(타이베이) 「자립만보」 부총편집을 맡았다.
1960년대부터 백양이라는 필명으로 「자립만보」와 「공론보」에 글을 발표하여 중국 문화의 병리현상을 비롯하여 사회와 관료의 추악한 현상을 공격했다. 1968년 3월 7일 ‘인민과 정부의 감정을 도발’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소위 ‘집행하지 않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악명 높은 화소도火燒島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9년 26일 만인 1977년 4월 1일 출옥했다.
옥중에서 ‘백양역사연구총서’ 3부작을 준비하여 9년에 걸쳐 완성했으며, 출옥 후 <중국제왕황후친왕공주세계표中國帝王皇后親王公主世系表>, <중국역사연표中國歷史年表>, <백양 중국사(원제목:중국인사강中國人史綱)>를 잇달아 출판했다. 또한 72권에 이르는 방대한 <백양판 자치통감柏楊版資治通鑑>을 1983년부터 10년에 걸쳐 모두 세상에 선보였으며, 1985년 중국인과 중국 역사의 부정적인 면을 대담하게 폭로한 <추악한 중국인丑陋的中國>을 출간하여 국내외에서 엄청난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백양은 대만으로 건너온 뒤 인간의 순수한 감정과 최소한의 인권마저 짓밟는 독재에 붓으로 맞섰고, 장개석 정권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결국 그를 9년 넘게 감옥에 가두었다. 그 기간 동안 백양은 역사를 선택했다. 25사와 <자치통감>만을 참고하여 쓴 <백양 중국사>는 마치 25사와 <자치통감>에서 피의 역사만 뽑아서 구성한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역사서다. 방대한 <백양 중국사> 전편을 휘감고 있는 불타는 듯한 그의 역사의식은 정치와 사회에 대한 처절한 해부에서 비롯되었고, 그 불길과 함께 타올라 끝내는 장렬하게 산화하는 비극적 카타르시즘을 전달한다.
이제 이 3분의 1가량의 제명에 죽지 못한 제왕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이 비명에 죽은 자초지종을 하나하나 연구하여 그 죽음의 원인과 결과를 검토함으로써 그 이면의 진상을 밝히고자 한다. 오호라! 모든 흉즉한 죽음은 비극이다. 하지만 이러한 황제의 죽음은 비극일 뿐만 아니라 비가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많은 음표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성질과 짐승의 성질, 인간의 권리와 국가의 권리 그리고 지혜와 어리석음, 이것들이 우리를 깊은 사유에 빠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