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강원도 춘천 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중국 사천미술학원 유화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전공은 서양화지만 일찍부터 동양미학을 좋아해 결국 38세의 늦깎이 나이로 유학을 다녀왔다. 대학, 군, 유학시절을 빼곤 오로지 고향 춘천의 소양 강변에서 그림에만 전념하는 무식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상賞이 걸린 공모전에는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을 만큼 그림은 누가 누구와 경쟁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행복한 인생’의 정의로 ‘좋아 하는 일이 있고,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추위를 녹이는 모닥불이 되는, 배고픈 이의 빵이 되는, 슬픔을 달래주는 손길이 되는 ‘소통’으로서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17회의 개인전을 했다.
꿈결 같은 것이 세월이요 바람 같은 인생이라 하더니!
어느 사이 나이 오십이 넘었다. 머리카락은 이미 이모작을 한지도 오래됐건만 그런데도 아직 지각知覺이 들지 못했다.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맹문이(일의 옳고 그름이나 일에 대한 분간을 못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재주까지 메주다 보니 삼류화가쯤 될 것인데 성격까지 덥절덥절한 구석이 없어서였을까. 겨우 삼순구식(三旬九食:삼십일 동안 아홉 끼니 밖에 먹지 못함)이나 겨우 면하면서 살아온 쫄대기 인생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반평생 화업 인생은 그야말로 멈출 수 없이 달려야 했던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길 험하고 굽이 많은 어둠 속 삶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음각 깊은 삶의 궤적이었다고나 할까. 낡은 기와집 옆쪽으로 소외양간 달 듯 방 하나를 대롱 덧붙인 신혼 셋방에서, 자객의 칼처럼 엄습하여 오던 빈궁의 막막함이 떠오른다. 오로지 그림만 그리며 먹이를 구하겠다는 다짐에 뒤따라오던 끝 모를 위태로움, 살점을 베어내는 것처럼 아프게 스며들던 그 고통스러움이 선명한 돋을새김으로 기억난다.
‘무식한 놈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비록 사방 발 딛는 모든 곳이 가파른 벼랑이고 불만 붙이면 이내 터질 시한폭탄 같은 세상의 미래가 두려웠어도 나는 그저 내 갈 길만 갔는데 그건 참 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올라서지도 못할 높은 곳을 쳐다보기보다는
어떤 나만의 세계를 위해서 외롭게 소외되는 것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겠다고 그땐 믿었다. 그랬더니 조촐한 평화가 찾아왔다. 조그맣게 살다가 소리 없이 죽어도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와 같은 생각엔 변함이 없다. 더듬이 잘린 곤충처럼 어리어리한 꼴로 오므라들기만 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성기고 서투를지언정 각진 세상 둥글게 감싸 안는 그림만 그리면 더없이 족할 것 같다.
그리고 이웃들의 삶에 밑반찬이 되는 그림, 한 끼 식사의 설렁탕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신발에서 탄 내 나고 눈썹 휘날리게 뛰어야 하는 이 사회에서 조금 외떨어져 다른 사람의 인생에 네비게이션이 되어 주지는 못할지라도 따뜻한 이불이 되어 주고 슬픔을 달래주는 그림을 그린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겠는가. 나는 진정으로 내 발성에 맞는 목소리를 찾고 싶고 삿된 욕망 없이 담백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까짓것, 여드레에 팔십 리 걸음으로 더디고 느리게 가면 어떤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한 발을 내딛는 것이겠다. 그 한 발걸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