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문학박사). 여러 차례 프랑스, 독일, 미국 등지의 대학 연구소와 도서관에서 서양 중세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며 연구한 바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서양 중세 봉건사회의 구조와 형성 및 농촌경제다. 전공에 관한 수십 편의 논문이 있다. 지금까지 단독 저서로는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 서유럽 대륙지역을 중심으로』(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 서유럽 농노제와 봉건적 주종관계의 형성 및 인종문제』(사회평론아카데미, 2017)가 있다. 단독 번역서로는 이르미노 저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영지명세장』(한국문화사, 2014), 마르크 블로크 저 『서양의 장원제: 프랑스와 영국의 장원제에 대한 비교사적 고찰』(번역 개정판: 한길사, 2020)와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번역 개정판: 사회평론아카데미, 2023), B. H. 슬리허르 판 바트 저 『서유럽 농업사 500-1850년』(번역 개정판: 사회평론아카데미, 2023)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서양 중세의 장원제, 즉 촌락을 바탕으로 한 상당한 크기의 토지가 영주직영지와 농민보유지로 구성되고 직영지는 후자를 보유한 예속민의 부역노동으로 경작되는 고전적 형태의 장원제는 일찍이 루아르 강과 라인 강 사이의 갈리아 북부지역에서 발달했다. 흔히 고전장원제라고 일컬어지는 이런 장원제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9세기 초에 성립하여 카롤링시대에 전형적으로 발달했으며, 여기로부터 유럽의 여타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갈리아 북부지역은 이렇듯 역사적으로 서양 고전장원제의 발상지이자 발달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갈리아 북부지역에서 고전장원들로 조직되어 경영된 영지의 토지소유 상황을 기술한 카롤링시대의 ‘영지명세장(polyptychum)’은 10여 개쯤 전해지고 있다. 이들 명세장은 고전장원제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되는 귀중한 자료다. 그러나 그 대다수는 그 내용이 뭉뚱그려져 기술되어 매우 간략한 편이거나 단편적 잔존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파리 시의 도심에 위치한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es) 수도원의 영지명세장은 18세기 말의 화재로 원래 기록의 절반 정도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장원제에 관한 기술내용이 여타의 명세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체제를 갖추고 소상하다. 장원별로 영주직영지의 상세한 재산과 수입 및 경영 현황은 물론, 영지명세장 가운데 유일하게 무려 총 1,700개가 넘는 농민보유지마다 거의 빠짐없이 토지이용 형태별 면적과 의무내용이 명기되고 수천 명에 이르는 보유농민과 그 가족의 이름ㆍ신분ㆍ거주지가 명시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여러 부류의 장원 예속민과 많은 기부토지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이 영지명세장은 고전장원제의 구조와 여러 양상을 연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카롤링시대를 중심으로 한 중세 전기의 토지이용 방식과 농업기술, 촌락구조, 신분제도, 결혼과 가족 제도 등 경제적ㆍ사회적 제반 상황을 파악하고 중세 초기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더욱이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영지명세장에 기재된 장원들은 북부 갈리아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오늘날의 파리 지방 일대에 분포해 있었다. 그리고 이 명세장의 작성연대는 명시된 바는 없지만, 영지명세장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시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820년대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작성 시점이 빠르다는 것은 이 영지의 장원제적 조직화도 빨라 여타 영지의 장원제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을 시사한다. 이처럼 영지가 중세 장원제가 발달한 갈리아 북부지역 가운데서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장원조직과 명세장 작성이 선진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도 이 명세장의 중요성을 더해 준다.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영지명세장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세 서양의 장원제와 농촌사회 연구를 위해 더없이 소중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일찍이 이 영지명세장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라틴어로 된 수사본(手寫本) 상태의 명세장을 근대적인 책으로 간행한 이는 문헌학자이자 역사가인 게라르(B. Guerard)였다. 그는 프랑스의 왕립 도서관에 보존되어 오던 “이르미노 수도원장의 영지명세장(Polyptychum Irminonis abbatis)”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카롤링시대의 영지명세장 가운데 가장 이른 1844년에 파리의 왕립출판사(L’imprimerie royale)에서 “샤를마뉴 시대 수도원장 이르미농의 영지명세장 또는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망스와 농노 및 수입 명세장(Polyptyque de l’abbaye Irminon ou denombrement des manses, des serfs et des revenus de l’abbaye de Saint-Germain-des-Pres sous le regne de Charlemagne)”이라는 긴 이름의 책으로 처음 발간했다. 총 2권으로 된 책 중 영지명세장의 라틴어 원문은 제2권에 게재하고, 제1권에서는 무려 1,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지면에 걸쳐 이 명세장의 내용과 관련하여 상세하고도 박학한 설명과 주석을 달고 있다. 그의 박학다식하면서도 정치한 주해는 이 영지명세장과 장원제에 대한 학계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 명세장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반세기 후 론뇽(A. Longnon)은 게라르의 뒤를 이어 1886~1895년간에 파리에서 샹피옹(H. Champion) 출판사를 통해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영지명세장(Polyptyque de l’abbaye de Saint-Germain-des-Pres)”이라는 제목으로 이 명세장을 다시 발간했다. 그는 제1권의 “서론(Introduction)”에서는 명세장의 내용을 설명하고, 제2권에는 영지명세장의 라틴어 원문을 게재했다. 그렇지만 그는 대체로 게라르가 발간한 영지명세장과 해설을 따랐으며, 다만 게라르의 편찬본에서 부족하거나 타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일부 보충하고 수정하는 수준에 그쳤다.
근래 1993년에는 독일의 헤게르만(D. Hagermann)이 그의 제자들인 엘름스호이저(K. Elmshauser)와 헤트비히(A. Hedwig)의 협력 아래 “생제르맹데프레의 영지명세장(Das Polyptychon von Saint-Germain-des-Pres)”이라는 제목으로 쾰른 등지에서 뵐라우(Bohlau) 출판사를 통해 이 영지명세장을 발간한 바 있다. 이들 제자가 같은 시기에 이 명세장에 대한 훌륭한 연구서를 별도로 출판한 때문이겠지만, 이 책에는 상세한 주석이나 설명이 없다. 그러나 그는 라틴어 명세장의 원래 모습을 연구자들에게 정확하고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극진한 노력을 경주한 자세하고 사실적인 서지학적 성과를 책에 담고 있으며, 게라르나 론뇽과는 달리 이 명세장에 나타나는 모든 지명과 인명 및 사항을 망라한 색인을 달고 있다.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영지명세장은 높은 사료적 가치 때문에 이처럼 거듭 수정ㆍ보완되어 새롭게 발간되어 왔다. 그뿐만 아니라 이 명세장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진행되어 다른 어떤 영지명세장보다도 연구 성과가 많이 축적된 편이다. 그렇지만 이 명세장 전체를 오늘날의 언어로 옮긴 책은 옮긴이로서는 찾지 못했다. 다만 필요에 따라 극히 그 일부만 영어나 프랑스어로 번역한 사례는 더러 있다. 이 명세장의 전문이 현대어로 번역되지 않고 있는 주요 원인은 무엇보다 명세장 전체를 일반인이나 학생들에게 제시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상당한 분량에 이르는 오래전의 이 고문서를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옮긴이가 명세장 전체를 우리말로 옮기고자 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서양 중세의 장원제에 관한 중요한 사료를 직접 읽고 이용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봉건적 토지소유에 관심을 가진 분은 이 번역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듣던 서양 장원제의 실제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한글 번역서로도 부족하여 라틴어 원문을 보고자 하는 분은 인터넷 검색 업체 ‘구글(Google)’에서 제공하는 게라르와 론뇽의 두 라틴어 원문을 가상공간에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우리말 번역의 원본이 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영지명세장은 앞에서 말한 게라르, 론뇽, 헤게르만 등이 간행한 세 가지 원서다. 옮긴이는 곳에 따라 원문에 약간씩 차이가 나고 주석이 상이한 세 원서를 대조해 가면서 이용했다. 라틴어로 쓰인 원서는 일정한 형식과 체계 아래 반복적으로 기술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번역이 쉬웠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명세장은 막상 서술체계에 일관성이 없다든가, 모호한 문장이나 불분명한 단어사용이 드물지 않다든가, 탈자(脫字)와 오자가 적지 않다든가 하는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려운 문제는 카롤링시대의 독특한 용어와 제도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옮긴이는 정확한 문맥과 뜻을 파악하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고 여러 가지 문헌을 참고했다. 참고문헌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참조한 것은 중세 라틴어 사전인 J. E. Niermeyer, Mediae Latinitatis Lexicon Minus (Leiden: E. J. Brill, 1984)와 더불어, 전술한 게라르의 간행본 중 이 명세장에 대한 설명과 주해를 담고 있는 제1권의 Prolegomenes, commentaires et eclaircissements와 이 명세장에 대한 근래까지의 연구성과를 흡수한 탁월한 종합적 연구서인 K. Elmshauser & A. Konrad, Studien zum Polyptychon von Saint-Germain-des-Pres (Koln: Bohlau, 1993)이다.
옮긴이는 학계의 연구성과를 최대한 참고하려고 하는 등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직도 면밀하게 참고하지 못한 연구성과가 제법 남아 있으며,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지만 이 영지명세장에는 학계 내에서도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한 문제나 불명확한 부분이 꽤나 남아 있다. 그래서 현재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장래에도 연구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연구 현실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이 번역이 서양 장원제 연구의 기초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하리라는 점을 위로로 삼으면서, 미진한 느낌을 떨칠 수 없지만 이제 마무리하여 출판하고자 한다.
이 영지명세장의 우리말 번역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의 기회를 제공해준 연구재단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리고 번역보고서 심사자들의 지적과 문제 제기는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연구원의 장지연 교수는 발음을 비롯하여 중세 초기의 라틴어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제공해 주었고, 동아대학교 프랑스문화학과의 양인봉 교수와 경성대학교 사학과의 이경일 교수는 일부 까다로운 프랑스어 고유명사의 발음을 검토하여 교정해 주었다. 조순주 박사는 번역과정에서 교정작업을 비롯한 여러 어려운 일을 도와주었다. 이지은 명저번역 팀장을 비롯한 한국문화사 관계자들은 신속ㆍ원활하면서도 능숙한 일솜씨로 좋은 번역서가 출판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었다. 이 번역서는 이분들의 참여와 기여로 완성될 수 있었다. 이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