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중어중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중어중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현대문학을 전공하면서 민간전설과 신화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저서로 ≪중국의 민간전설 양축이야기≫, ≪루쉰의 광인일기, 식인과 광기≫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중화유신의 빛 양계초≫ ≪중국 고건축 기행≫ ≪색채와 중국인의 삶≫ 등이 있다.
중국현대문학, 그중에서도 중국현대소설을 전공하는 필자가 중국홍수신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그건 아마도 2005년 즈음부터 중국문화, 나아가 아시아문화의 원형archetype으로 어떤 것들을 제시할 수 있을까 탐색하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화원형을 찾기 위한 여정을 민간전설과 소수민족문화 살펴보기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무렵 민간전설로는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臺의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 사랑을 담은 양축梁祝이야기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소수민족문화로는 나시족納西族의 순정殉情문화, 동파교東巴敎와 상장의식喪葬儀式, 그리고 이와 관련된 문학텍스트를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문화원형을 특정 지역과 민족의 삶의 규범의 토대가 되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본래 모습이라고 거칠게나마 규정한다면, 민간에 오랫동안 전해지는 가운데 민중의 사랑을 받은 이야기나 특수한 문화현상, 그리고 이와 연관된 습속과 제도 등에서 문화원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원형에 대한 관심은 신화적 존재, 예컨대 복희伏羲와 여와女媧, 반고盤古 등에 대한 고찰로 이어졌고,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중국의 신화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특히 나시족의 문화에 대한 연구는 중국 소수민족의 다채로운 신화와 접하게 되는 귀중한 통로가 되었다. 다행히 그 무렵에 총 16권의 중화민족고사대계中華民族故事大系와 총 30권의 중국민간고사집성中國民間故事集成이 출판되어 있었던 터라 연구에 필요한 원천자료는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이제 눈앞에 광활한 신화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지만, 혼자서 신화의 모든 영역을 감당하기는 벅찼기에 하나의 신화적 모티프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 하나의 모티프가 바로 홍수였으며, 이렇게 하여 홍수를 다룬 이야기에 대한 기나긴 연구가 시작되었다.
홍수 이야기에 대한 애초의 관심은 중국의 한족과 소수민족의 신화와 전설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홍수설화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진척되자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의 홍수설화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으며, 뒤이어 류큐열도, 동남아시아, 나아가 오세아니아의 홍수설화를 알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홍수설화를 어느 한 지역이나 국가의 틀이 아니라, 지역과 국가를 뛰어넘은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학술연구의 욕망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스무 해 가까이 홍수설화에 붙들려 있었으며, 끊임없이 확장되는 학술적 호기심과 욕망의 결과물이 이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서적의 책명 중의 동아시아는 넓은 의미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용어임에도, 오세아니아와 인도가 포함된 것 역시 이러한 욕망이 투사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그동안 여러 학술지에 발표했던 여러 편의 논문들과 이번에 새로이 작성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 기왕에 발표했던 논문들은 대부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부 논문은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상당 부분을 수정하거나 보완하였다. 아울러 일본과 류큐열도의 홍수설화, 오세아니아의 홍수설화에 관한 논문은 이 책에 처음으로 게재하였다. 이들 논문들은 기본적으로 중국과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대만, 류큐왕국, 오세아니아, 인도 등지에 구전으로 전승되어오거나 문헌자료로 전해져온 홍수설화를 정리·소개하는 한편, 유형type과 모티프motif에 따라 분류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지역과 국가에 따라 홍수설화의 편수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홍수설화의 양상이 대단히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분류를 우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분류에 기반하여 지역과 국가에 따라 홍수설화의 유사성과 차별성을 검토하고자 하였다.
동아시아의 홍수설화는 크게 대륙성 홍수설화와 해양성 홍수설화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한국과 중국, 동남아 대륙부의 홍수설화는 대륙성 홍수설화에 속하고, 일본열도로부터 류큐열도, 대만, 동남아 해양부와 오세아니아의 홍수설화는 해양성 홍수설화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이 두 부류의 홍수설화는 홍수 재해의 양상, 홍수 발생의 원인, 피신방법과 수단 등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홍수라는 자연재해에 대한 기본적인 사유체계를 달리하고 있다. 이 책의 1장부터 8장까지는 특정 지역과 나라를 중심으로 홍수설화의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면, 9장부터 11장까지는 비교신화학의 관점에서 두 지역 이상의 홍수설화를 분석하고 있다. 이 가운데 9장의 ‘대만, 류큐열도 및 일본 본토의 홍수설화’는 8장의 ‘일본 류큐열도의 홍수설화’가 지닌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덧붙여진 보론補論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밝혀둔다.
신화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가 19세기에 흥기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화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갖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신화는 기본적으로 오랜 옛날 인류가 남긴 동굴벽화나 고대문명의 유적과 유물처럼 인류가 어떻게 살았는지, 자신을 둘러싼 객관세계에 대해 어떻게 사유했는지를 보여준다.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의 우리에게 원시인류의 삶의 양상과 사유체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화는 ‘살아있는 화석’과 같은 것이다. 신화는 오랜 옛날 인류의 논리 이전의 원시사유를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는데, 이들의 원시사유는 대체로 황당무계하다고 느낄 만큼 무질서하고 비논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에 대한 연구는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과 더불어 인류가 남긴 각종 유·무형자료를 바탕으로 인류의 삶을 복원하고 문화의 원형을 추적하는 중요한 통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를 연구하기 시작한 이래,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부닥친 곤혹스러움은 설화연구의 기본 용어인 모티프의 개념이 지닌 애매모호함이었다. 톰슨Stith Thompson은 1946년에 The Folktale이라는 책에서 모티프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의 최소 요소(the smallest element in a tale)’이며, 그 부류로서 이야기 속의 인물actors과 사항items, 그리고 단독의 사건single incidents을 제시하였다. 톰슨이 제시한 모티프의 개념은 이후 민담은 물론 신화의 유형을 나누고 유형색인을 엮을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기본단위가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의 모티프의 개념이 모호하며, 어떤 철학적 원칙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던디스Alan Dundes는 이란 글에서 톰슨이 제기하는 인물과 사항, 사건이 동일한 부류의 양적 계량 단위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인물이나 사항을 포괄하지 않는 사건을 떠올릴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던디스는 프롭Vladimir Propp의 민담형태학 이론과 미국 언어학자 파이크Kenneth L. Pike의 언어학 이론을 융합하여 알로모티프allomotif와 모티핌motifeme이란 용어를 제기하였다. 즉 던디스는 프롭의 기능function 대신에 파이크의 모티핌으로써 전체 이야기구조 속에서 어떤 모티프가 지니는 기능을 나타내는 한편, 언어학에서의 용어인 알로allo를 차용하여 알로모티프란 용어로써 동일한 모티핌의 위치에 놓을 수 있는 모든 모티프를 가리켰다. 다시 말해 이 모티프들은 표면적으로는 각기 다를 수 있을지라도 전체 이야기 구조에서는 동일한 기능을 발휘하며, 따라서 모티프들의 내재적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던디스는 라는 글에서 자신의 이론을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의 구조분석에 응용하여 몇 가지 구조유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던디스의 모티핌의 개념을 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담의 구조를 분석한 이는 조동일 교수였다. 그는 1970년에 출간한 서사민요연구에서 모티핌을 단락소段落素로 번역하여 소개한 바 있으며, 같은 해에 발표한 이란 글에서 ‘단락소란 단락의 보다 추상적인 내용으로서, 단락이 다른 단락과 어떠한 성격의 대립적 관계를 갖는가만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티핌에 관한 조동일 교수의 선구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제의식은 이후의 연구자들에 의해 확장되거나 심화되지 못한 듯하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모티프라는 용어 역시 여전히 톰슨이 언급했던 개념에 머물러 있다. 그렇기에 어떤 신화나 전설에 나타나는 각종 인물과 사항, 사건이 뒤엉킨 채 모티프라는 용어로 죄다 일컬어지고 있다. 설화연구에 있어서 모티프라는 용어의 개념에 대해 보다 치열한 논의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홍수설화를 연구과제로 삼아 고투하는 동안 홍수설화를 연구하는 국내외의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빚을 졌다. 이들의 선행연구가 없었다면, 그리고 이들이 보여준 신화적 상상력이 없었다면 이 연구는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척박한 번역환경 속에서 귀중한 원천자료를 번역해낸 역자들의 분투에 감사드린다. 아울러 구하기 쉽지 않은 외국의 논문자료를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꼼꼼히 챙겨준 전남대학교 도서관 선생님들께 특별히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 책이 그나마 모양새를 갖추어 출판될 수 있도록 수고하신 전남대학교출판부의 여러분, 그리고 학술연구의 동지로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아내에게 감사드린다. 이 책이 신화 연구에 조그마한 디딤돌이 되기를 소망한다.
2024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