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에게 미안하다. 밥버러지라서 미안하다.
세상의 혁명가들에게 미안하다. 남의 집 불타는 것 구경만 하여서 미안하다. 티끌 하나 태우지 못해서 미안하다. 내 집이든 남의 집이든 티끌 하나도 태울 용기가 없다. 비겁해서 미안하다.
아내에게 미안하다.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나 자신보다 더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
하나님에게 미안하다. 믿는 척해서 미안하다.
2002년에 시집 『술병처럼 서 있다』를 낸 후 18년이 되었다.
다시 18년 후에도 나의 몸 안에 한 권의 시집이 또 남아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2020년 입춘지절에
아버지가 쓰던 골방에서 진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