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7월 4일, 저쟝성 통샹현 우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선더홍이며, ‘마오둔’은 그의 첫 소설 『식 3부작』을 발표할 때 처음으로 사용한 필명이다. 신흥 자산 계급인 증조부, 진보적이고 학구적인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고전에 관해 적지 않은 소양을 갖추었던 어머니 덕분에 마오둔은 일찍부터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7세 되던 1913년에 베이징대 예과에 입학했고, 20세 되던 1916년에 예과를 마친 뒤 상하이 상무인서관 편집부에 취직했다. 1920년대 초반에 상무인서관에서 발행하던 문예지 『소설월보』 편집장을 맡으면서 사실주의 문학을 제창하며 전면적인 혁신을 꾀했지만 원앙호접파의 강한 반발을 샀다. 이 무렵 저우줘런, 정전둬, 왕통자오, 예사오쥔 등과 함께 ‘인생을 위한 문학’을 말하는 ‘문학연구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중국 공산당 초기 당원이 되기도 했다. 『소설월보』 개혁 시도가 무산된 뒤 마오둔의 활동은 문학에서 점차 사회 운동으로 옮겨 갔다. 아내인 콩더즈와 함께 5·30 사건에 참여했고, 상무인서관 노조 파업 투쟁을 성공을 이끌기도 했다.
1927년 장제스의 4. 12 쿠데타 이후 상하이에서 숨어 지내며 첫 소설인 「환멸」을 발표했다. 이어 1928년에 「동요」와 「추구」를 발표했고, 이어 일본으로 건너간 뒤 장편 소설 『무지개』(미완)와 『신화 잡론』, 『서양 문학 통론』, 『북유럽 신화 ABC』, 『중국 신화 ABC』 등을 썼다. 1930년 상하이로 다시 돌아온 뒤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입했고, 중편 「길」, 「삼인행」, 장편 『깊은 밤』 등을 썼다. 그 밖에도 『문학』, 『역문』, 『언림』, 「구망일보」 등을 창간했다. 이후 장편 소설 『부식』, 『상엽은 2월의 꽃처럼 붉다』, 『단련』과 희곡 『청명 전후』를 썼다. 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 부주석과 중국작가협회 주석, 중앙인민정부의 문화부장직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81년 8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죽기 얼마 전 장편 소설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원고료 25만 위안을 중국작가협회에 기부하여 ‘마오둔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