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전북 부안군 동진면 당봉리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지에 「이 땅의 헤엄 못 치는 선생이 되어」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무 위의 여자』, 『만다라화』, 『어머니 나라』, 『나쁜 사과』,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슬픔아 놀자』, 『목포, 에말이요』가 있다. 현재 민족작가연합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목포살이 몇 해당가?
손꼽아 시어봉게 삼십육 년이네그려.
그런디 아직도 목포는 생소하기만 허다.
이유는 딱 하나 목포에서 태어나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포 벗들과 약주도 허면서 잘도 지내다가도 행여 용댕이바다를 건넜다느니, 동목포역에서 공짜 기차를 탔다느니, 동명동과 용당동이 순 뻘밭이었다느니, 수문포니 불종대니 멜라콩다리가 어쩠느니, 외팔이니 물장시니 쥐약장시가 어쩠느니, 이런 추억담으로 흐를 때는 머리가 하얘진다.
그런디 교직을 은퇴하고도 여길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내 고향 당봉리가 그리운디도 여그 머무는 까닭은 목포에서 살아온 세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귄 벗들이 수두룩허고 거리거리 골목골목이 산도 바다도 섬들도 나를 붙들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목포에 들어와서 6월 항쟁을 겪었고 전교조 문제로 해직이 되어 거리의 교사로 살아야 했다. 1990년대 교육운동, 시민운동을 계속허다가 복직이 되어 그리운 아이들과 해우도 허고 월드컵 때 아이들과 거리응원도 허고 압해도, 가거도를 거치면서 강산을 세 번이나 바꿨으니 목포는 나에게 체화된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런디 나에게 목포를 소재로 하는 시가 별로 없다. 이제라도 목포에서 살아온 세월을 담금하고 간을 쳐서 짭짤한 밥상을 차린다. 에말이요∼ 목포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