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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A. Kittler)1943년 독일 작센주 로흘리츠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동독에서 보냈다. 전후 교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 키틀러는 자신의 아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고,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책처럼 말하는” 아버지를 기꺼이 흡수하여 일곱 살 때 이미 괴테의 파우스트를 암송할 정도였다. 자유로운 삶과 교육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키틀러 가족은 1958년 동독을 탈출하여 베를린을 거쳐 서독으로 이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정착하였다.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프랑스 국경 지방인 라르에서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1963년부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독일어문학, 로망스어문학,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의 1976년 박사 학위 논문은 이듬해 『꿈과 말: 콘라트 페르디난트 마이어의 통신 체계 분석』으로 출판되었으며, 1982년 독일문학사 전공 대학교수 자격 취득 논문으로 제출한 『기록시스템 1800/1900』은 긴 논란 끝에 통과하여 1985년에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기록시스템의 1900년대 부분을 확대하고 보완한 『축음기·영화·타자기』가 1986년에 출간된 후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라는 첫 문장은 그의 이름에 따라다니는 매체 결정론의 유명한 명제가 된다. 그 외의 주요 저서로는 『어머니, 시인, 아이』(1991), 『드라큘라의 유산: 기술적 글들』(1993), 『헤벨의 상상력: 어두운 자연』(1999), 『문화학의 문화사』(2000), 『그리스로부터』(2001), 『광학적 미디어』(2002), 『불멸자들. 추모 글, 기억, 유령과의 대화』(2004), 『음악과 수학 제1권 헬라스 제1부 아프로디테』(2006), 『음악과 수학 제1권 헬라스 제2부 에로스』(2009) 등이 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버클리 대학, 스탠포드 대학, 샌타바버라 대학의 방문 교수 자격으로 미국에 머물렀으며, 1987년부터 93년까지 독일 보훔 대학에서 현대독일문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1993년부터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매체 미학 및 매체 역사의 교수로 부임하여 학생들과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가르치며 매체사적 연구를 이어나가는 한편, 그리스어와 고대 그리스 문헌을 배우고 가르치며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시원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키며 저술을 이어나갔다. 2011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골은 베를린 도로테엔슈타트 묘역에 안치되었다. 키틀러의 미발표 및 미완의 원고와 데이터들은 마르바흐 독일 문학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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