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가지고 있는 오래된 염원의 하나는 늙지 않고 오래 사는 불로장생이었다. 중국을 통일하여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진시황이 서복이라는 신하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명을 내렸던 것을 보아도 불로장생의 염원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진시황은 50세를 넘기지 못하였기에 불로장생의 염원을 달성하지 못했으나, 한국 등 선진국에서는 오늘날 평균수명이 80세를 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백세인도 점점 증가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의 일반인은 장수에 대한 염원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노화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노화과정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노화과정을 늦출 가능성이 있는 방법과 젊은 외모를 유지하는 방법 등은 날로 향상되고 있다. 그 결과, 생활환경 개선과 적절한 건강관리를 통해 오늘날의 80대는 과거의 60대에 버금가는 정도의 건강과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
젊게 오래 살고 싶은 염원을 상당한 수준까지 달성한 현대인들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으로 보이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수명은 연장되었지만 그 대신 고혈압, 당뇨와 같은 만성질환과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등 치매를 유발하는 각종 질환의 위험이 높아졌는데, 이들 질병은 장기간의 관리가 필수적인 만큼 본인과 그 가족에게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발생시킨다. 또 현대인은 은퇴 이후에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불안하다. 과거에는 젊은 시절 열심히 자녀를 키우고 일하다 은퇴하면 약간의 저축과 성장한 자녀의 도움으로 노후생활을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균수명만큼만 산다고 하여도 일하지 않으면서 2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데(한국의 공식퇴직연령인 60세에 은퇴했다고 했을 때), 이에 얼마만큼의 노후자금이 필요한지 알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노후를 위한 저축을 충분하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년기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된 나라들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령연금이나 의료보험으로 노인들의 기초생활 비용과 의료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수명 연장은 국가재정에도 큰 문제를 야기한다. 고령자 수가 증가하면서 국가의 의료비 지출과 이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총 연금 액수가 급증하고 있다. 현재의 근로자에게 부과된 사회보장세로 은퇴자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부과방식으로 운영하는 미국에서는 근로자 수에 비해 고령 은퇴자 수의 비율이 수명 연장으로 인해 점차 커지므로 연금재정이 악화된다. 한국과 같이 자신이 납부해서 적립한 금액을 받는 적립형 연금의 경우도 사람들이 예상보다 오래 살게 되면서 자신이 적립한 액수보다 훨씬 더 많은 액수를 받게 되므로 기금이 고갈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위기를 인식하여 일부 정치인이나 연금전문가 등은 국민연금이나 공무원연금 등 공적 연금의 기금이 곧 고갈될 것이므로 기여금을 더 늘리고 수령액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반면 멀지 않은 시기에 연금수령을 앞둔 사람이나 일부 사람들은 이에 반대하고 있는데, 두 입장간의 논쟁에 대한 보도를 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되었다. 날로 열악해지고 있는 연금재정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것은 경제학자나 연금전문가, 정치인이 머리를 맞대고 묘수를 찾아야 하는 복잡한 문제일 것이다.
이와 같이 경제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를 카스텐슨 박사는 사회복지학, 사회학, 정치학, 의학, 생물학, 공학 등 인접학문의 지식을 융합하여 발달심리학적으로 해결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카스텐슨 박사의 핵심 주장은 우리 모두 인간의 수명이 현재에 비해 짧았던 시절에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였던 생애주기 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60년 정도로 짧았던 시절엔 인생을 3막으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1막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교육 단계로 청년기까지에 해당하며, 2막은 직업을 가짐으로써 일과 가족부양에 몰두하는 가장 바쁘고 활동적인 성인기에 해당한다. 3막은 일과 가족부양의 의무에서 벗어나서 그다지 길지 않은 기간에 여가를 즐기다 질병 등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시기이다. 이러한 생애 주기 모델은 각 단계별로 해야 하는 역할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어서 자신의 해야 할 일, 즉 발달과업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성인기는 일과 자녀양육이라는 두 가지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야 하므로 가족 및 친지들과의 충분한 정서적 교류가 가능한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없기에 모두에게 힘든 시기이며, 이 힘든 시기는 은퇴 후의 여유로운 생활로 보상받으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카스텐슨 박사는 이러한 모델이 장수시대에는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기대수명이 100세 정도 될 것으로 예측되는, 현재 자라나고 있는 어린 세대는 현재처럼 65세(미국의 경우)나 60세(한국의 경우)에 은퇴한다고 했을 때 거의 40년을 생산적 활동없이 여가생활이나 특별한 목적 없는 일상적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이는 비생산적 활동을 하는 기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생산적인 활동을 할 때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경험하므로 생산적인 활동을 할 만큼 건강한 은퇴자에게 일에서 완전히 분리된 삶은 심리적으로 긍정적일 수 없으며, 생산활동 없이 40년 정도의 노후생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재정 차원에서나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카스텐슨 박사는 이러한 문제는 연장된 인간의 수명을 모두 노년기 생활에만 사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20세기의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류의 오랜 염원인 장수가 가능해지게 되었는데, 우리가 가지게 된 여분의 시간을 노년기에만 써야 할 이유는 없으며 각 단계를 조금씩 더 연장함으로써 발달과업을 수행하느라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쫓기지 않으면서 각 단계를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카스텐슨 박사가 이 책에서 제안한 새로운 생애모델은 5막 정도로 구성된다. 1막은 교육에 집중하는 청년기까지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는 배워야 하는 지식과 기술이 과거시대에 비해 증가하고 있기에 30세까지 연장될 수 있다(졸업을 유예하면서 진로모색을 하거나 취업준비를 위해 20대를 보내고 있는 현재의 한국 청년들에서 이 시기의 특징을 엿볼 수 있을 듯하다). 2막은 30대의 젊은 성인기인데 이 시기는 청년기에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일을 고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양한 일을 시간제로 근무해보면서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찾는 단계이다. 시간제 일로 생기는 여유 있는 시간은 자녀양육에 사용할 수 있어서 이 시기에 자녀양육이 젊은 성인에게 부담이 되기보다는 가족의 의미와 인생의 즐거움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30대에 다양한 직업을 시도해 본 젊은 성인은 40대부터는 자신에게 최적의 직업을 선택하여 전일제로 근무하는 인생의 3막으로 진입한다. 일에 집중하는 단계이나 언제 은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사회적 압박이 없으므로 일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이웃에 지원하는 재능 기부나 취미 활동 등에 시간을 쓰는 시기로 대략 80세까지 연장될 수 있는 단계이다. 4막은 전일제 일에서 서서히 철수하면서 숙련된 직업기술을 사용하되 시간제로 신체를 덜 사용하는 방향으로 일을 지속하고, 그 결과 늘어난 여유 시간에 재능 기부나 봉사활동 등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게 되는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는 인생을 정리하는 단계이다.
이 생애주기 모델에서는 인생의 전반부(1막과 2막)는 사회의 도움을 받아서 유능하고 독립적인 성인으로 자라고 후반부(3막부터)에는 자신의 능력을 자라나는 어린이와 지역사회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전반부에 지역사회로부터 받았던 혜택을 지역사회로 돌리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후속세대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어야 인간사회 전체가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카스텐슨 박사의 철학이 깃들어 있는 생애주기 모델이라 하겠다.
이러한 모델은 연장된 수명을 잘 활용함으로서 우리의 행복수준을 높일 수 있는 모델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모델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단계적 은퇴가 시작되는 70대까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사회가 지나치게 경쟁적이지 않아야 하며, 직업전환이나 시간제에서 전일제로의 진입에 어려움이 없어야 할 것이다. 미국과는 달리 노동시장이 유연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고려해 보면 현실성이 없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모델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수를 얻어낸 현대사회의 각 구성원이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심리적, 사회적 변화가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모델이라 생각한다.
새로운 생애주기 모델이 새로운 발달적 사회모델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사고가 열려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건강관리를 일찍부터 해야 하며 생산활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4막 이후의 생활을 위해 저축해야 함을 카스텐슨 박사는 이 책의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다. 장수시대가 되었다고 모두 장수하는 것이 아니며, 장수를 하더라도 병상에서 10년 이상을 보내는 것은 장수의 이점을 누리는 것이 아니므로 건강관리에 대한 개인과 국가차원의 노력이 필요함도 실험적 증거를 토대로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가 우리의 노년기 건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 요인에 의해서 그 표현형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최근의 후성유전학 연구결과와 열악한 환경에 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동들은 5세가 채 되기도 전부터 교감신경계가 만성적으로 활성화되어 스트레스에 취약하지만 이들이 입양되거나 환경이 개선된 후에는 이러한 특징이 사라진다는 연구결과 등을 제시하면서, 카스텐슨 박사는 건강한 삶이 노력에 의해서 또 사회의 지원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카스텐슨 박사는 왜 사람들이 저축을 충분하게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진화심리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매우 짧았던 진화역사(인간이 수렵채집으로 살던 시절)에서는 현재의 편안함이 미래의 편안함보다 더 중요하였기에 미래를 위해 현재의 편안함을 약간 희생시키는 것이 무의미하였을 것이므로 그 후손인 현재의 인류도 현재의 편안함을 추구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다양한 실험적 증거로 보여주고 있다. 또 현재의 편안함을 더 추구하는 우리의 특성을 감안하여 저축이 개인의 선택이 아닌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수입의 일정 비율을 저축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책은 장수시대의 생애주기 모델을 심리학, 의학, 분자생물학, 경제학 분야의 이론과 실험적 증거를 토대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중요하지만, 길어진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실용적으로도 중요하다. 40년 가까이 아동발달을 배우고 가르치고 연구해왔던 본인은 나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관심이 아동에서 노인으로 변화되어서 최근 노년발달심리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노인심리에 관한 카스텐슨 교수의 수 많은 연구를 접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저술된 A long bright future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의 번역이 심리학, 사회학, 사회복지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과 복지정책을 만드는 사람뿐만 아니라 노년기 생활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번역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심리학을 전공한 역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경제학적 개념과 미국의 연금제도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개념을 역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류기철 교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책이 번역 출판되도록 애써주신 박영사 노현 부장과 편집을 맡아준 전은정 선생께 감사드린다.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역자의 한계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