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언어장애로 방바닥에 썼던, 시인이란 꿈은 지금 걸어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만 쓰면 되리라 여겼던 시는 산으로 바다 위 뜬구름 같았습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사는 동안에 무엇이든 해야지’ 쉼 없는 어머니의 기도와 묵묵히 믿어주는 가족들의 응원에 다잡았습니다.
특히 ‘너는 시’라고 단언 해주셨던 詩母 고희림 시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예상보다 더 느린 성장에도 시를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시가 하늘에서 내려 준 동아줄 같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의 현실 속에 숨 쉬고 있으면서도 늘 웃었던 나날은 거대한 파도가 올 리 없다는 안도감이었을까요? 사람들도 잘 만나고 존재에 대해 타인보다 시간만 더 걸릴 뿐, 긍정적이던 제게 어린 시절 말 하나 못하고 좋은 건 좋다는 식의 지나온 삶의 파편들은 슬픔, 분노를 동반한 태풍이었습니다. 어쩌지 못하는 저의 원망이었고, 어쩌면 죽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여긴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힘든 1, 2년이란 시간에 부지런히 시에 매달렸습니다. 그랬기에 제 나름대로는 시를 재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단어 나열이 아니라 어느 단어 하나가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시간에 따뜻하게 안아달라는 게 시였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스스로 밀어내지 못하는 용기는 시를 씀으로써 느리게 느리게 위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위축되었던 제 잠재력과 가능성으로 영남일보 시민기자단에 추천해주신 김호순 심리상담소 소장님(시민기자단 회장님)과, 서홍명 시민기자 전 회장님이 계셨기에 예전 저를 찾았고 꿈의 씨를 뿌릴 수 있었습니다.
감사한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김인숙 교수님, 김미숙 유경예술단 단장님, 부족한 작문 아래 사랑으로 코멘트를 달아주시던 권기홍 선생님, 항상 엄마처럼 제 장애는 아무렇지 않게 보시는 김영재 선생님, 윤필희 선생님 등 저를 보듬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중고교 시절 웃음소리, 걸음걸이도 비슷해 학교 아버지라고 불렸었던 양경규 선생님, 갓 졸업했을 때 ‘니는 니 맘에 실린 짐 내려놓으면 꼭 잘 될 거라’ 하시던 그 말씀이 생생합니다. 곁에 계셨더라면 아직도 꾸지람을 듣고 있었을 제자가 모진 길들을 뚫고 첫 시집을 내었습니다. 너무 그립고 존경합니다.
지난여름, 7, 8년만에 다시 뵈었을 때 이제 시집 내자고 권해주신 김채원 모D 민주시민교육공동체 사무국장님, 꿈에 그리던 첫 시집을 정성스레 출판해 주신 삶창의 황규관 시인님과 직원분들께 두 손 모읍니다.
이 밖에도 제 삶의 온기를 채워주는 모든 인연들에게 앞으로 삶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날씨보다 더 오락가락인 뇌병변이란 제 친구, 어쩜 길게 사랑하는 법을 지금 이 시간에도 배우고, 다른 몸보다 더 험하게 쓰는 몸에게 수고한다고, 감사하다고.
마지막으로 호주 유학 중인 내 동생 혁아! 느린 힝아가 미안하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힝아가 많이 사랑한다!!
2024년 10월 1일 단골 카페 ‘라일락뜨락 1956’에서.
松釮 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