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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작품을 내지는 않았지만, 쓰는 족족 화제가 되어 온 소설가이자, 평론가 겸 교수. 본명은 류철균. 이인화라는 필명은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평론과 소설을 겸하는 두 사람(이인화)이라는 뜻도 있다.
어린 시절 이인화의 집에는 장농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책이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1년 동안 용돈을 모아 산 기타를 치다가, '이 새끼가 딴따라 될라카나' 하는 소리와 함께 기타를 박살내 버린 엄한 아버지는, 돈이 생기는 족족 책을 사들이는 독서광이었다. 덕분에 이인화는 기타는 못 쳤지만, 일찍부터 책더미 속에 묻혀 살수 있었다.
이 책더미를 헤집고 다니며 초등학교 때 이광수 전집을 독파했고, 야한 연애 소설부터 철학책까지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소설이 지루해지면 만화와 무협지가 그의 독서욕을 채워주었다. 성적표에 '글짓기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지만 학교 성적은 도서량과 반비례 해, 국어 과목을 빼고는 '수'를 받은 경우가 드물었다. 중학교 때도 성적은 반에서 7~8등 정도였고, 고등학교 내신성적은 3등급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신춘문예 본선에 진출하고, 2학년 때 동인지를 만들었을 만큼 문학에 열성이었으나, '문인인 척하기 위해' 술 담배를 하다가 B형 간염에 걸려 고생했다. 재수는 불가피했으나, 재수 기간 동안 독하게 공부해 어느 대학 어느 과든 갈 수 있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IQ가 두 자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력이 출중한 인물임을 짐작케 한다.
신춘문예에 연속 낙방한 후, 서울대 국문과 1학년 때부터는 시에서 평론으로 노선을 바꿨다. '경쾌한 시인이라기보다는 따분한 산문가일 수밖에 없구나'라고 절감한 탓이었다. 그러나「히포크라테스의 흉상」이 대학 공모에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기성 문예지에 부지런히 보낸 평론들은 번번이 퇴짜를 맞는 신세였다.
1988년에야 '양귀자론'으로 문예지 한 구석을 채울 수 있었으나, 원고지 70매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누가 평론을 읽는가' 하는 회의가 들면서 소설 쓰기에 돌입했다. 남인 계열의 후손인 집안 어른들이 어려서부터 들려준 이야기에서 출발한 <영원한 제국>이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오랜 문학적 방황은 일단락되고 그의 갈 길이 정해졌다.
그의 소설 쓰기는 방대한 인문학적.역사학적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한다. 어려서부터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의 책을 읽고 발췌하던 습관의 연장선상에서, 관련 서적들을 섭렵하고 메모 카드를 만드는 것이 소설 작업의 전반부가 된다.
그리고 나서 오후 4시부터 실제 집필에 돌입해, 9시쯤 본 궤도에 오르려고 노력하다 밤 11시~새벽 1시 사이에 집중적으로 원고를 써나간다. 1주일에 하루 이틀은 연구소의 3인용 의자에서 눈을 붙이게 된다. 그에게는 휴일이 없다. 그래서 '비오면 쉬는 노가다'가 부러울 때도 있다.
그의 소설들은 대체로 정치성이 강하다. 자신의 역사적.사회정치적 문제의식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설득하는 느낌도 든다. 이러한 문제제기적 기법은 그의 소설 쓰기 목적과도 일맥상통한다. 당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작가이기보다는, '욕을 하건 동의하건 화제를 던지는 작가'이기를 그는 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경북대 국문과 교수, 동생은 경남 양산 국어교사로, 3부자가 모두 국문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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