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론 브란도는 1924년 미국 네브라스카에서 태어났다. 전후 시대, 가장 영향력있는 배우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는 청소년 시절 문제아로 낙인 찍혔던 그는 부친의 권유로 입학한 육군 사관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학업을 중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후 보잘 것 없는 일들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내는 그를 보고 이에 격분한 그의 아버지가 좀 더 의미있는 일을 해볼 것을 충고했는데, 이것이 그가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19세 때 연극학교에 들어가 미국에서 명성을 날리던 작가 스텔라 애들러의 눈에 든 뒤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스타니스라브스키의 연기 기법에 몰입하여 스스로 많은 연구와 피나는 노력을 한 그는 리스트라스버그의 액터스 스튜디오에 들어가 본격적인 연기 수업을 받고, 몇 편의 연극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1943년 보비노에서 데뷔공연을 한 후, 1946년 브로드웨이 데뷔작 <아이 리멤버 마마>에 출연한다. 이를 통해 브로드웨이에서 호평을 받은 그는 이듬해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47)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다.
헐리우드의 손짓을 받고도 줄곧 거절하던 브란도가 선택한 영화 데뷔작은 1950년 <맨>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하반신 불수의 전쟁 피해자를 실감나게 연기했다. 또한 이듬해엔 연극에서 만났던 극작가 엘리야 카잔를 찾아가 자신의 연기를 보여준 뒤 캐스팅을 따내고 그와 의기투합해 영화화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다. 1954년에는 <워터 프론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할리우드의 정상급 연기파 남자배우로 우뚝 선다
그후 여러 작품에서 특유의 카리스마를 보여준 브란도는 10년 넘게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60년대에 한때 소강상태에 빠지기도 했으나, 70년대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보여준 소외된 도시인의 모습으로 재기를 한다. 이후 <대부>의 돈 콜레오네 역으로 정치적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지만 아카데미상을 받으며 명성을 재확인한다. 또한 잠깐씩밖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슈퍼맨>과 <지옥의 묵시록>에서조차 관객을 압도하는 자신의 명연기를 보여준다. 2001년 <스코어>,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에서 출연하여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마치 컴퓨터와 같이 실수가 없는 정통 메소드 연기로 이름을 날린 그의 스타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교과서가 되었으며 영화 속에서 그가 훌륭하게 표현해낸 주인공들의 고독과 삶에 대한 열정, 반항적 기질은 그가 출연한 작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주로 멕시코나 남태평양, 아시아 같은 소수민족 출신의 여인들과 결혼없이 동거생활을 계속했고, <바운티호의 반란> 촬영시에 알게 된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영화 출연시에만 헐리우드로 왔다. 그에게는 헐리우드식의 질서나 관념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상업성 같은 것하고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그는 가족문제와 재정문제로 순탄치 않은 삶을 보냈고, 남과 만나지 않는 은둔생활도 해야했다. 특히 자유로움을 지나쳐 방종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1966년 매입한 테티오로라섬에 거액을 투자해 섬 전체를 개인 별장으로 삼기도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또 아들이 살인자로 구숙되고, 딸이 자살하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첫 부인인 웨일즈출신 여배우 앤나 캐쉬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크리스천은 지난 1990년 배다른 여동생 치옌의 남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딸 치옌마저 1995년 25살의 나이에 자살하였다.
그는 모두 3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부인은 멕시코 출신 여배우 모비타 카스테나, 세 번째 부인은 타히티 출신 타리타 테리피아 이다.
2004년 7월 1일, 캘리포니아주 UCLA 의료센터에서 폐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8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