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대형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오페라의 유령> (문학세계사)과 <아르센 뤼팽 전집>(까치글방)의 번역자, 성귀수씨와 즐거운 만남을 가졌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번역이란, 아무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부족할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번역을 시작한지 2-3년만에 자신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성귀수씨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았습니다. (인터뷰 | 알라딘 편집팀 문학담당 최성혜, 박하영) 본격적으로 번역에 뛰어든 건 1999년부터 알라딘: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성귀수: 몇 권의 책을 공부 삼아 번역하면서, 출판사도 기웃거리다 보니 계속 번역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주변에 의논을 했는데, 마침 소설도 쓰고 번역도 하는 정영문이라는 괴짜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성귀수씨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은 아마 번역일 겁니다”라고 말이죠.(웃음) 그래서 시작하게 됐죠. 본격적으로 번역에 뛰어든 건 1999년부터니까 얼마 안됐어요. 알라딘: 번역하기 전/도중의 습관이 있다면? (예를 들어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다는가, 연필을 몇 자루씩 깎는다는가, 혹은 가장 잘된 번역문장을 읽어본다든가 하는.) 성귀수: 특별한 습관은 없어요. 뭐, 작업할 때 KBS FM을 틀어놓는 정도. 거의 들릴락말락할 정도로 볼륨을 줄여놓고 작업에 들어가죠. 일단 개성이 강한 작품을 번역할 때는 거의 편집광적으로 그 분위기에 빠져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빛의 돌>을 작업할 때는, 번역할 텍스트와 거의 상관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이집트 상형문자 교본을 옆에 놓고 매일 한 글자 씩 외워가며 번역을 하기도 했죠. 작업실 풍경을 묘사해보자면, 컴퓨터 책상이 ㄴ자형으로 놓여있구요. 거기에 책상이 하나 더 붙어있어요. 의자를 가운데 두고 ㄷ자형으로 포위하는 셈이죠. 그 안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작업에 몰두하는 데 많은 보탬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벽을 둘러가며 책이 쭉 꽂혀있는 서가가 있구요. 군데군데 해골이라든가 물신적(物神的)인 골동품들이 장식용으로 포진해있지요. 작업실이 지하라 꽤 으스스하죠. 상상이 되세요? <813의 비밀>을 번역할 땐, 그 책 자체가 굉장히 스릴 넘치는데다가 작업실 분위기까지 그래서, 가끔씩 등골이 오싹오싹해지곤 했답니다. 9 to 12, 직장인과 똑같은 생활리듬 알라딘: 번역작업의 속도와 패턴이 궁금합니다. 글쓰는 이들은 대개 한밤중에 머리를 싸매고 작업에 몰두할 것 같은 이미지가 지배적이잖아요. 성귀수씨는 어떠세요? 성귀수: 일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좀 무식하게 하루를 쓰는 타입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수영을 한 다음, 정오까지 작업을 해요. 점심을 먹고 1시~7시, 조금 쉬었다가 9시부터 자정까지 나머지 분량을 하죠.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는 시를 쓰는 데 할애하구요. 거의 매일 야근을 자청하는 모범 직장인이나 다름없어요. 작업실이 집에 딸려있는 바람에, 뤼팽 시리즈 번역에 들어갈 때는 분명 추운 겨울이었는데, 현관 밖으로 오랜만에 외출을 해보니 화사한 봄이 되어 있어서 놀란 적도 있습니다. 음, 속도는 뤼팽 시리즈의 경우 하루에 2백자 원고지로 150장 정도씩 하는 것 같아요. 1달에 1권 반정도 한다고 보면 될까요. 알라딘: '문학정신'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신데, 시작과 번역이 서로 영향을 미치나요? 성귀수: 완전히 상반되는 작업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를 쓸 때는 독자를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만의 문제지요. 나와 텍스트만 존재한다고 할까요. 그에 비해 번역은 읽는 사람을 의식 안 할 수가 없어요. 텍스트 너머의 독자를 늘 생각하게 되죠. 시를 쓸 때와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뭔가 '소통'을 한다는 느낌… <오페라의 유령>처럼 사람들이 많이 읽은 책의 경우, 이런 느낌이 더욱 분명해지죠. 텍스트를 거슬러 올라가 '작가'가 된 기분으로. 알라딘: 발레리 라르보는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또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나간다. 하지만 저울에 올리는 것은 사전에 정의된 말이 아니라 저자의 말이다. '저자의 정신이 투입되어 스며들어 있고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이긴 하지만 깊은 수정이 가해진' 말이다. 그것은 살아서 고동치는 말이며 원문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다리를 뻗어 작품 전체와 긴밀히 얽혀 있다."고 이야기했는데요. 번역작업을 계속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면, 어떤 점이 있을까요? 성귀수: 번역의 원리는 무엇보다도 원저자와의 동일시에 있다고 봅니다. 저자가 내 앞에 제출한 텍스트를 독자에게 얌전히 전달하는 게 아니라, 텍스트에서 시작해 거꾸로 저자 자신에게로 거슬러 올라가 그 쪽에서 독자를 바라보며 다시 쓰기 시작하는 것이죠. 바로 그런 점이 매력적인 것 같아요. 다만 번역이 창작보다 불편한 점은, 경우에 따라 시간 제약이 있다는 것과 글쓰기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점이죠. 또, 우리말 실력은 느는데 외국어 실력은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다는 아이러니컬한 기분도 들어요. 적당한 우리말 표현을 못 찾아서 한 줄 번역하는데 하루가 걸린 적도 있어요. 그런 경우, 외국어 실력은 문제가 안 되거든요. 오히려 우리말이 더 어렵죠. 아무튼 번역작업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어요. 언어를 다루는 게 즐겁거든요. 한정된 요소로 이루어진 언어를 이리저리 조립하다가 딱 들어맞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정교한 레고 블럭을 맞추는데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번역을 할 때 퇴고는 3번 정도 해요. 문장 단위, 단락 단위, 챕터 단위로. 옮기는 문장의 의미전달이 초벌작업에 해당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감, 말의 리듬, 구문의 조화 등등을 점검하는 데 할애되죠. 요컨대, 자기 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의 매력 중 또 하나는, 어떤 문제 하나를 놓고 마치 승부를 겨루듯, 난해한 수수께끼처럼 풀어나가는 데 따른 쾌감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포탄파편>을 번역할 때 일인데, 책에 독일군의 420mm짜리 대포 얘기가 나오거든요. 근데 아무리 뒤져도 그 시대에 420미리 짜리 대포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부분의 확실한 근거를 찾기 위해 하루종일 자료를 뒤졌죠. "어디 해보자!!" 그런 심정으로... 그러다 마침내 독일에서 특수하게 사용한 사례가 있었다는 걸 알아냈을 때의 기쁨이란! 보통 책 한 권을 번역할 때, 참고자료를 충분히 갖추는 편이지만, 이번 뤼팽 시리즈의 경우도 뤼팽에 관한 주변 참고서적들을 굉장히 많이 봤어요. 보다 치밀하고 정확하게,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알라딘: 번역하신 책마다 성귀수씨 특유의 개성이 강하게 묻어납니다. 장중하고 유려하며, 언어의 조합도 상당히 치밀하고 농도가 짙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요. 자신의 번역에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성귀수: 의미의 정확한 전달과 이미지에 중점을 둬요. 문장을 지나치게 세분하다 보니 때론 부사구와 접속사가 많아지기도 하는데, 스스로 경계해야 할 점이라 생각해요. 특히 원작이 만연체일 경우 되도록 그 문체를 살리려고 하는데, 그럴 때 자칫 함정에 빠지기가 쉽죠. 사실 제 경우엔, 번역할 때 의미전달에 골몰하면서 빠지는 머리카락보다 이미지나 문장의 조화로움에 치중하느라 빠져 달아나는 머리카락이 더 많을 겁니다.(웃음) 제 번역문에 가끔씩 난해하거나 현학적인 단어가 튀어나온다는 점을 지적하는 분도 계신데, 글쎄요... 전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선 어려운 단어라고 해서 굳이 피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때로 한자어가 원어의 이미지와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어감이나 말의 리듬을 고려할 때도 그렇고, 한자어가 표의어라서 의미가 집약되는 부분이 있죠. 쉬운 말이 있는 데도 억지로 어려운 말을 선택한다기보다는, 어려운 말이라서 무조건 피해가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싶네요. 알라딘: 자신의 번역물에 대해서 얼마만큼 만족하고 자신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번역 역시 일종의 창작과정이라서 자괴감과 자부심의 양극단을 오갈 것 같은데... 성귀수: 자괴감 같은 건 거의 없어요. 늘 원작보다 낫다는 자부심을 갖고 번역을 해야 마땅하죠. 자기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고 한 번역은, 읽는 사람이 금방 알아요. 말하자면, '확신범'이 될지언정, 자신 없는 번역으로 대중을 기만하는 건 절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없는 성과물은 아예 내놓지 말아야죠. 근본적으로 남의 글에서 시작된 텍스트이기 때문에, 나중에 오역인 부분이 발견되면 그때그때마다 수정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번역'은 100% 완벽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니까. 단, 원 저자의 심부름꾼 같은 번역은 안 해요. "저자를 우회해서 기습한다!" 이런 생각으로 작업을 하죠. 알라딘: 공교롭게도 성귀수씨가 옮긴 최근의 대표 역서들이 복잡한 문제에 휘말린 경우가 많습니다. 3개의 출판사가 같이 내놓은 <오페라의 유령>과 <아르센 뤼팽 전집>이 그 예인데요. 이런 경우 필연적으로 번역이 독자들의 선택 준거가 될 수 밖에 없는데,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느낀 적은 없으세요? 성귀수: 확실히 부담이 되죠. 나름대로 자극을 받는 부분도 있지만, 건설적인 부담감이 아니라는 게 문제예요. 저는, 어떤 번역서가 중역(重譯)이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이 이미 완역한 책은 다시 번역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일종의 '낭비'라고 생각해서요.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여러 출판사에서 동시에 내는 건 정말 시간 낭비, 돈 낭비, 인력 낭비 아닌가요? 처음엔 나름대로 신경도 쓰이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는데, 그런 게 여러 권 계속 되고, 읽는 분들의 평도 상대적으로 괜찮다 보니 지금은 그래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 편이에요. 문제적 캐릭터 '팡토마' 시리즈를 번역하고 싶어 알라딘: 앞으로 어떤 책들을 번역하고 싶으세요? 성귀수: 장르소설/ 파격적인 내용의 인문서적들/ 번역했을 때 영향이 큰 작품들/ 금서(禁書)이면서 동시에 베스트셀러의 성격을 지닌 작품들을 번역하고 싶어요. 지금 제 서가에 한 50여 권 정도 엄선해서 구비해놓고 있는데, 차례차례 기회가 닿는 대로 번역을 해나갈 계획입니다. 영어 작품으로는 제일 먼저, 토마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알콜중독자의 고백>을 번역하고 싶어요. 아직 국내에 완역된 적이 없거든요. 그 작가는 19세기 초반 영국의 삼류작가였는데, 그 작품 하나로 보들레르를 위시한 이후 세대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아편중독의 체험을 집중적으로 파고든 최초의 문학작품이면서 표현이 굉장히 치밀하고 분위기는 데카당하죠. 문학사적으로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작품입니다. 불어 작품으로는 너무도 많지만, 우선 프랑스의 범죄모험소설인 <팡토마 시리즈>(피에르 수베스트르, 마르셀 알랭 지음)를 번역하고 싶어요. 전32권 짜리 시리즈인데, 뤼팽의 조카뻘쯤 되지요. 캐릭터가 변장에 능하고 대담무쌍한 범죄를 저지르는 점에서는 뤼팽이랑 비슷하지만, 훨씬 더 잔혹하고 피를 좋아하는 '문제적(問題的)'캐릭터에요. 그밖에도 쥘 베른의 80여 권에 이르는 작품들이나, 알렉상드르 뒤마의 걸작들도 욕심나는 대상입니다. 프랑스 신비주의 계통 인문서적들 중에도 번역하고 싶은 책들이 꽤 많습니다. 엄청난 노다지가 우리나라에는 너무도 소개가 안 되고 있다는 안타까운 느낌입니다. 알라딘: 직접 소설을 쓰실 생각은 없으세요? 성귀수: 제가 스토리텔링에 약해서 그런지 소설 쓸 욕심은 별로 없어요. 제게 창작이라 하면 오로지 시(詩)만이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껏 10년을 미뤄온 시집을 내년에 낼 계획으로 있는데, 읽기 까다로운 제 시를 과연 어디에서 선뜻 내줄지 걱정입니다. 알라딘: 지옥에 있는 작가 중에서 아무나 불러올 수 있다면, 누구를 불러오겠는지, 이유는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성귀수: 질문이 참 재미있군요(웃음)… 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전에 「시와 사상」에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로 대신할 수 있을 듯 하네요. 프랑스의 대시인 다섯 명, 즉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아폴리네르, 발레리를 불러와서 3일 밤 동안 '시'에 대해 난상토론을 하는 장면을 묘사한 산문이었거든요. 가능하다면 그들을 실제로 불러내고, 나는 그저 곁에 앉아 그들이 토론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어요. 알라딘: 다른 번역가의 작업 중에서 인상깊었던 작업이 있었다면? 성귀수: 김종건씨의 <피네간의 경야> 번역작업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오랜 세월 초지일관 조이스를 연구해온 데다, 결국에는 그 불가능한 작업을 해냈다는 것 자체가 존경스러웠죠. 번역의 맛을 처음 느낀 건 안정효씨가 번역한 밀란 쿤데라의 <생은 다른 곳에> 를 읽었을 때에요. 평소보다 두 배의 시간을 투자한 <조선기행>이 기억에 남아 알라딘: 지금까지 번역한 것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어떤 책이세요? 또 만족스러움을 떠나서 번역작업 자체가 잊혀지지 않고 마음에 남는 책이 있다면? 성귀수: 번역에 있어 만족감이란 항상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지금 하고 있는 아르센 뤼팽 전집이 제일 만족스럽습니다. 그 중에서도 1권을 참 즐겁게 번역했다고 기억하구요. 지금도 그 때의 기분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어요. 또한 아폴리네르의 산문작품집 두 권은 제가 나중에 자비를 들여서라도 반드시 호화장정으로 재출간하고 싶습니다. 별로 빛은 못봤지만 가장 열심히 번역했던 책은 <조선기행>이에요. 구한 말에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종단하면 쓴 풍속기행문이라 하나도 소흘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번역에 매달렸죠. 번역 내내 국내 사학자나 민속학자의 따가운 시선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어요. 그 계통으로는 제가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사전자료도 많이 준비하고. 아시아 쪽 지도만 5장,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의 상고사를 비롯한 역사서 등등을 잔뜩 쌓아놓고 공부해가면서 했으니까, 아주 고생했죠. 넉 달 걸려 했으니 평소보다 두 배 세배 더 걸린 셈이에요. 나중에 생면부지인 경북대 모 교수님이 그 책을 읽고 나서, 고맙고, 감동했다고 전화 주셨던 게 기억에 남아요. 알라딘: 마지막 질문입니다. 평소 독서 경향은 어떠세요? 성귀수: 이론서를 많이 보는 편이죠. 수학/과학/언어학/건축학 등등 주로 논리중심적인 서적들을 좋아합니다. 글 쓰는 사람이니까 문학 책을 많이 볼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요. 시인이지만 남의 시집도 잘 안보는 걸요. 다른 저자 인터뷰 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