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전후의 '순정만화천하' 시절 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노말시티>의 강경옥, <바람의 나라>의 김진, <불의 검>의 김혜린, <풀하우스>의 원수연, <점프트리 A+>의 이은혜. 그 시기는 바야흐로 여성만화가들에 의해 평정되었던 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입니다. 이들과 함께 만화계를 이끌었던 신일숙씨를 만나기 위해 알라딘 편집자 두 명이 작업실이 위치한 일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계속되던 장마비가 그치고 모처럼 여름해가 난 더운 날이었지만, 가는 길의 고생은 시원한 포도쥬스와 귀여운 고양이 세 마리로 인해 모두 잊었습니다. 최근 작업 중이신 <아라비안나이트>를 비롯, 만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한 시간 내내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바쁘게 펜을 움직였습니다. 한국만화의 대모 신일숙씨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여러분도 같이 한 번 만나보세요. (인터뷰 | 알라딘 편집팀 만화 담당 김세진, 문학 담당 박하영)
중견 만화가 신일숙씨의 일상
알라딘 : 작업실이 참 넓고 쾌적하네요. 일산으로 작업실을 옮기신 것이 언제쯤이었지요.
신일숙 : 1995년 작업실 겸 주거지로 쓸만한 곳을 찾던 중, 이 곳을 발견했어요. 평수는 60평대로 매우 넓은 편이지만, 당시에는 일산의 대형평수 아파트값이 저렴했던 편이었어요. 운이 좋았지요(웃음). 현재 함께 생활하는 식구는 3명 정도, 그리고 고양이 세 마리가 있어요.
알라딘 : 작업하실 때 주로 음악을 들으면서 하세요?
신일숙 : 전 음악보다 드라마를 주로 봐요. 드라마는 거의 다 보죠(웃음). 어제는 '황태자의 첫사랑' 봤고, '작은아씨들', '파리의 연인'은 주말에 재방송으로 보고.
알라딘 : 일반인들은 만화가들이 어떤 만화를 읽는지 궁금해합니다. 최근 재미있게 보신 만화가 있으세요?
신일숙 : <나의 지구를 지켜줘>의 작가인 사키 히와타리가 그린 <미래의 전각>을 보고 있어요. 그런데 이 작품, 마지막권을 통 구할 수가 없어서 아직까지 결말을 알지 못해서 정말 답답합니다. 그 외에 <고스트 바둑왕>이라든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박소희씨의 <궁>과 같은 작품도 읽어봤어요.
알라딘 : 일본 작품을 생각보다 많이 읽으시네요. 최근 나오는 한국의 젊은세대 작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일숙 : 제가 읽은 작품은 주로 학원물과 패션에 관계된 만화가 많았어요. 다소 안타까운 점은 학원물의 스토리가 예전보다 단순하고 식상하다는 것이예요. 하이틴로맨스와 같은 소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러한 소재도 여러가지 다른 이야기와 함께 얽혀있을 때에 훨씬 재미가 배가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알라딘 : 그렇다면 최근에 읽으시고 꼭 구입해야겠다고 마음먹으신 만화책이 있으세요?
신일숙 : 허영만씨의 <식객>. 1권은 한 번 봤는데 반드시 사서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허영만씨의 만화 중에 소장할 만한 좋은 작품이 참 많아요. <타짜>도 언젠가 꼭 살 거예요. 그 외에 고우영씨의 작품. 그런데 이 분 작품은 출판사가 모두 다른 곳이라 한꺼번에 구입하기가 힘들어요. <수호지>, <수레바퀴> 등, 요즘 다시 나오고 있어서 즐거워요.
알라딘 : 소설책도 많이 읽으시나요? 읽으신다면 주로 접하시는 분야는 어떤 것인지요.
신일숙 : 원래 만화 많이 보는 사람들이 소설도 많이 봐요(웃음). SF, 역사 쪽의 소설이 아무래도 많지요. 딱히 어떤 책을 가려 읽는 것은 아닌데, 삶의 냄새가 너무 풍기는 소설은 안 읽는 편이예요.
알라딘 : 간혹 만화가들은 자신의 작품 중 애착이 가는 캐릭터를 언급하기도 하는데요, 선생님께도 그런 등장인물이 있을까요?
신일숙 : 제 캐릭터는 모두 작품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지요. 주인공 위주가 아닌, 작품 한 덩어리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끝까지 살아남는 비중이 큰 인물이든, 배경으로 한 번 등장하는 인물이건간에 모든 캐릭터는 저에게 있어서 귀중합니다.
알라딘 : 작가의 작품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가의 모습을 반영하기 마련인데요. 선생님의 경우에는 어떤 캐릭터가 가장 자신과 닮아있다고 생각하세요?
신일숙 : 제가 그린 캐릭터들은 모두 저를 닮아있다고 생각해요. 비록 100% 저와 같은 캐릭터는 없다고 해도, 그들에게 저의 모습이 조금씩 쪼개어져 들어가있지 않을까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주인공들은 그 성격과 얼굴생김이 모두 다르지만, 거기에는 저의 분신이 조금씩 스며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알라딘 : 선생님의 작품 중 <리니지>는 온라인게임으로 제작되며 만화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지요. 이 게임으로 인해 국산 온라인게임 붐이 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실제로 게임을 해보신 적은 있으세요?
신일숙 : '리니지 2'는 자주 하고 있어요. 재미있더라구요. 그런데 컴퓨터에는 그렇게 익숙하지 않아서요.
알라딘 :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으시다면 온라인쇼핑은 잘 안하시겠네요.
신일숙 : 네. 인터넷쇼핑은 많이 하진 않아요. 오히려 TV에서 방송해주는 홈쇼핑에 열광하죠. 초기에는 충동구매로 산 상품들도 많은데, 자꾸 시도하다보니 이제는 꼭 필요한 것만 사게 되더라구요.
그녀의 당찬 그녀들
알라딘 : <아르미안의 네 딸들>, <에시리쟈르> 등의 작품에는 다양한 여주인공들이 등장하지요. 다들 처한 운명과 성격이 매우 다르지만 남성에게 의존적이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간다는 점에 있어서는 닮아있다고 느꼈습니다. 여성캐릭터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 중에 그렇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신일숙 : 저는 '합리적인 사랑'을 중시하는 편이예요. 사랑 하나에 목을 매어 울고불고 하는 것은 질색이구요. 어려서부터 남성과 여성간의 애정은 인정할 수 있지만, 사랑을 이유로 여성이 남성에게 기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여성이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점도 마찬가지지요. 여성도 얼마든지 힘이 셀 수 있고, 경제적인 능력이 뛰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나라는 이런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한국사회에서는 아직까지 나이가 찬 딸자식은 부모님들에게 시집보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죠. 그녀가 시집가기 전까지 부모님은 일종의 책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구요.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길러진다는 것에 일부분 동감하며 그에 대한 반감도 있지요.
알라딘: 최근 홈페이지(www.armian.co.kr)에서 한국만화계의 현실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쓰신 짧은 글을 읽은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을 간추려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신일숙 : 한국만화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자하면 마음이 매우 복잡합니다. 최근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불법스캔이지요. 음악파일에 대한 정당한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인터넷에서 무료로 다운로드받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됩니다. 음악의 경우에는 가수-작곡가-작사자가 공동으로 그 피해를 입게 되어 피해가 반감되지만, 만화는 만화가 한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리다보면 많은 팬레터를 받아요. 간혹 책을 구입하지 않고 불법스캔을 통해 제 작품을 본 후, 내용에 대해 논하는 독자들이 있습니다. 만화가의 권리를 존중해주지 않는 독자는 그러한 이야기를 논의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지요.
저를 비롯한 만화가들도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 인터넷 보급 등과 관련된 주변환경으로 인한 것인지, 정부의 정책으로 인한 것인지, 소비자의 인식에 기인한 것인지 정확한 원인을 찾기가 매우 힘듭니다. 확실한 것은 만화가-출판사-독자들 모두가 만화의 미래를 살리기 위해서 하루빨리 원인을 파악하고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풍부한 원전을 고스란히 살린 <아라비안나이트>
알라딘 : 최근 발표하고 계신 <아라비안나이트>를 3권까지 읽어봤는데요. 모든 컷이 컬러로 작업되었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권당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지 궁금합니다.
신일숙 : <아라비안나이트>는 10권까지 나올 예정입니다. 아직 3권을 마쳤으니, 후반으로 갈수록 작업이 손에 익으면 점차 속도가 빨라지겠지요. 현재까지는 평균적으로 한 권당 두 달의 시간이 소요된 것 같아요.
알라딘 : <아라비안나이트>를 만화로 옮기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신일숙 : <그리스.로마 신화>와 <아라비안나이트>에는 예전부터 관심을 두어 왔고 언젠가는 만화로 옮기겠다고 결심, 개인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스.로마 신화>의 경우에는 이미 단편 몇 개가 발표된 바 있습니다. 출판사 측에서는 제 작품 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복간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고 그에 대해 의논하던 중, 마침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어요. 관심을 표하자, 출판사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제안을 해왔구요.
알라딘 : <아라비안나이트>의 경우 원전이 유명한 편이라 창작에 어려움이 있지 않으셨나요.
신일숙 : 의외로 사람들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제목에는 익숙하지만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자세히 알고 있는 이는 드물어요. 그래서 애초에 원전을 변형한 창작은 피했어요. 이미 내용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재해석한 창작물이 먹히겠지만, 오리지널의 내용이 잘 알려져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재해석해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원전에 충실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창작의 어려움은 덜했어요.
알라딘 :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신일숙 :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해야지요. <파라오의 연인>이후 연재할 작품을 2, 3개의 후보 중에서 고르고 있는 중이에요. <아라비안나이트>가 끝난 후에 <그리스.로마신화>도 계속해서 작업할 예정이구요. <그리스.로마신화>는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라 <아라비안나이트>보다 더 많은 창작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