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 끄적거린 것 같은 그림체, 툭하고 내뱉는 듯한 등장인물들의 대사, 주인공과 주변인물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캐릭터들에게 고르게 실린 비중.
<남자친9>, <Cracker 크래커>를 차례로 펴내며 알음알음 팬을 늘려가던 토마는 이제 만화 격주간지 '팝툰'에서 공히 인기 만화가로 꼽을 만한 입지를 굳히고 있습니다. 유리알처럼 마냥 맑지만은 않지만, 오색구슬처럼 미묘한 색채를 띤 20대의 나날을 심플하고 거친 펜체로 솜씨좋게 그려나가는 만화가, 토마씨를 만났습니다. (인터뷰 | 알라딘 도서팀 김세진)
"예쁜 것을 보면 마음에 불이 켜지죠."
알라딘 : 알라딘에 특히 팬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실은 저도 수줍은(?) 팬이고요. 반갑습니다.
토마 : 네, 저도 반갑습니다. 알라딘 여러분.
알라딘 : 어떤 질문부터 드려야 할까요. 만화 그리는 분을 만나면 꼭 물어보는 것이 있는데요. 하루 일과가 대략 어떻게 나뉘시나요? 주로 아침형 인간인지, 올빼미형 인간인지도 궁금하고요.
토마 : 평소엔 아침 여덟시쯤에 일어나서 낮 동안은 늘어져 있다가 밖에 볼 일도 보고 놀다가 어둑어둑한 오후가 되면 불안한 마음이 스며들면서 일을 손에 잡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마감 중엔 하루이틀 정도 밤을 새구요.
알라딘: 일과 중 만화를 그리는 것 외에 즐기는 취미 생활이 있으시다면요?
토마: 맛있고 예쁜 것을 좋아해서 백화점 식품관 가는 게 취미입니다. 오색찬란하고 투명하고 반지르르한 식품들을 보면 마음에 불이 켜지면서 신납니다.
크레페, 고후레, 떡, 연어, 차, 모찌…의 맛과 이미지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전거 타고 동네나 한강변 달리는 것도 좋아해요.
그 외엔 컵 모으기나 이어링 모으기가 있지만 워낙 하나의 취미에 깊이 몰두하는 편이 아니고 잘 깨고 잃어버려서 가짓수는 얼마 없어요.
알라딘: 같은 또래 만화가들에 비해 웹툰에서는 만나기가 힘든데요. <남자친9>는 파란에서 연재되기도 했지만요. 지면 연재를 선호하는 편이신가요? 웹툰 연재 의향은 있으신지도요.
토마: '속 좁은 여학생'이 지금껏 연재한 만화 중에서 가장 긴 시간동안 연재한 거라 한동안 웹에서 멀어져 있었는데 분위기도 전환할 겸 다시 웹에서도 연재하고 싶어요. 하지만 굳이 웹과 지면의 선을 정해놓고 작업하는 건 아닙니다.
"대사는 인상적이지만 보편적이어야 하지요."
알라딘: <남자친9>나 <속좁은 여학생> 등, 만화를 보면 마치 자신이 겪은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현실적인데요. 소재나 에피소드는 주로 어떤 경로로 구상하시나요. 그리고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는 개인적인 환경은 어떤 것인지요.
토마: 가만히 지켜보니 저는 주로 일상 속에 흐르는 리얼한 감정을 대변하는 결정적인 대사나 표정을 보면 표현의 욕구를 곧잘 느끼더라구요.
제 생활 속에서 발견한 대사나 인상들… 그러니까 제가 하는 수다 속에, 남들이 하는 수다 속에, 영화나 책 속에서 제가 인상적으로 느낀 것들을 유념해두어요. 그리고 그것은 어딘가 보편성을 띄고 있어야 하구요. 보편적이지만 표현하기 망설여지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구태여 말하기 뭐한 지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다보니 제가 겪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현실적으로 보여지는 것 같아요.(그런가?)
알라딘: 이제까지 그렸던 캐릭터 중 가장 감정이입이 잘 되었던 캐릭터, 혹은 동화되었던 캐릭터가 있으신가요.
토마: 나미루와 나미국과 허지관에게 제가 가진 성격이 다 고루 분포되어 있어요. 나미루의 잡생각 많고 불안정하고 가끔씩 폭주하는 성격, 나미국의 좁은 인간관계와 대세의 감성에 대해 보이는 시니컬한 면모나 예민함, 허지관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한 오지랖과 다정함. 각자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라 감정이입이 잘 됩니다.
알라딘: <속 좁은 여학생>을 읽다가 드라마로도 제작이 되었던 정이현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가 언뜻 생각나기도 했는데요. 등장하는 주인공 20~30대 여성이 겪는 에피소드를 보고 주변에 동일 나이대 친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토마: 대체로 주변 사람들이 프리랜서 작가나 디자이너, 편집자 정도인데 이 군이 연애를 참 안 하고 못해요. 여우보다는 곰 쪽에 가까운 여자들… 여우가 되고 싶어도 결국은 곰의 본질을 갖고 있는 여자들. 대충 둘러보니 나미루에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던데요. 자기 이야기나 생각 같아서 공감간다는 분들도 있고 찌질해서 보기 싫다는 분들도 있구요.
알라딘: 어떤 만화가분들은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어떤 장면' 하나를 떠올리고, 그 결말로 달려가기 위해 기-승-전을 구상하기도 하시는데요. 얼마 전 인터뷰했던 강도하씨도 <큐브릭>을 두고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속좁은 여학생>도 혹시 이미 어떤 결말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인지, 아니면 결말은 미정인 채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신지. 등장인물들 간의 얽히고 얽힌 심리전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궁금해 하는 팬들이 굉장히 많아서요.
토마: 어느 날 친구가, 친구로 지내던 이로부터 뜻하지 않은 고백을 들었는데 그걸 거절하면서 했다는 말이 정말 생생하고 난데없었거든요. 그래서 그 순간 나 그 대사 쓰고 싶다고, 괜찮겠냐고 했더니 허락을 해줬어요. 그 대사를 쓰고 싶어서 거기에 이런 저런 살을 붙였죠. 대체로 저는 이렇게 한 순간의 어떤 감정이나 대사에서 큰 인상을 받고 그 다음에 곁가지 살을 붙이는 식입니다. 하지만 '속 좁은 여학생'을 하게 한 그 대사는 중간 이야기의 탑을 잘 쌓지 못해서 그다지 임팩트가 없을 것으로 예상… 김이 새네요.
알라딘 : 만화를 읽고 남겨주신 평들을 보면 굉장히 좋은데, 다만 '만화가 좀더 길었으면 좋겠다'라는 아쉬움을 살짝 내비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장편 연재를 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토마: 저는 오히려 장편을 해보니 장편은 잘 못하는 것 같고 바닥도 드러나는 것 같고 긴 시간 동안 하나 붙잡고 있는 게 성미도 안 맞는 것 같아 앞으로 중단편만 할까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정해놔도 항상 바뀌더라구요. 계획은 잘 세우지만 자주 바뀌고 어디로 나아갈지 파악이 잘 안 됩니다. 장편을 할 수도 중편을 할 수도 만화를 하지 않을 수도.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때 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이고 시작하게 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붙잡고 하고 있겠죠.
알라딘: 이건 조금 사족인 것 같기도 한데, 캐릭터들이 다들 굉장히 패셔너블합니다. 패션에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있으신가요?
토마: 옷을 잘 입혀야 그 회에 그림 그리는 게 재밌어서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옷 자체가 예쁜 것도 좋지만 간단한 옷을 걸쳐도 그 형태가 세련된 것에 집중해요. 개인적으로도 패션에 관심이 있지만 잘 입고 다니려면 꽤 몰두해야 하더라구요. 그럴 만한 자원도 열정도 없어서 고만고만하게 훑는 정도예요.
알라딘: 지금껏 그린 작품 중에서 애초의 구상과는 많이 달라진 캐릭터가 있다면 누구일까요.
토마: 한소미요. 남자친구가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꾸 여지를 남기고 연애 감정을 느끼는 여자인 한소미를 좀더 발랄하고 유쾌하게 다루고 싶었어요. 그런데 관찰자로서 이해가 탄탄하게 되어 있지도 입장도 난처해서 흔들리더라구요. 중반부쯤에 왔을 때 명쾌해진 부분이 있는데 처음 시작부터 어긋나 있었던 거라 돌아갈 수도 없고 계속 달려야하니 점점 애초 구상과는 멀어진 캐릭터가 되어버렸죠.
알라딘: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만화가, 혹은 만화는?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을 꼽을 수 있을까요?
토마: 많은 분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큰 영향은 주변에서 잘 받는 편입니다. 이강주 선생님은 초창기에 그림관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잘 되어서 얻은 게 많았고 윤태호 선배님은 작가로서의 자세나 집중도에 대해 제시를 많이 해주세요. 또래 동료 중엔 '일본철도여행기'를 곧 출간할 김혜원씨. 다 그림을 잘 그리고 자기 컬러가 확실해서 좋아합니다. 제가 운이 좋아서인지 재능이 많고 훌륭한 분들 곁에 머물면서 좋은 영향을 받았어요. 이렇게 말하니 대충 제 성향도 나오네요.
"친해지고 싶은 만화가요? 안노 모요코, 호시 요리코씨요."
알라딘 : 서구/일본 모두 포함해서 해외 만화가 중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 사람이 있을까요? 이상한 것을 물어보는 것 같아서 조금 죄송하기도...
토마: 국내에서도 좋아하는 작가와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별로 없는 편인데 해외까지…! 그냥 와 좋다… 하고 감동하고 먼 발치에서 그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래도 말을 해 본다면 '해피매니아'의 안노 모요코와 '오늘의 네코무라씨'의 호시 요리코. '고스트월드'의 대니얼 클로즈.(감히) 언급만으로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데요. 친해지기는커녕 실제로 단 한 번이라도 보면 하얗게 얼 것 같습니다.
알라딘: 만화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요.
토마: 저는 잡생각이 많고 희로애락을 크게 느끼는 편인데 이런 성격이 만화란 직업에 잘 맞는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어요. 그래서 달리 다른 걸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아마 이 일로 생활을 연명하지 못하고 백수였다면 요리나 복식 쪽에 기웃거렸을 거 같아요. 전혀 할 줄 모르지만 누가 그 일을 배우기로 했다란 소릴 들으면 재밌겠고 부럽더라구요.
알라딘: 자신만의 징크스가 있다면?
토마: 잘 몰랐는데 친구가 그러더군요. 내가 무언가에 크게 기뻐하거나 벅차하고 있으면 곧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그런데 정말 그렇더라구요. 슬픈 이야기네요.
"30년 뒤, 다양한 곳에 접목 가능한 그림을 그리는 현대작가가 되어 있으면."
알라딘: 태어나서 처음 그린 만화(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나세요?
토마: 마나마나라는 비평동호회 회지에 '모르는 일'이라는 작은 만화를 그렸습니다. 책상 속에 사는 사람도 아닌, 동물도 아닌 애들의 헛헛한 농담 같은 네컷만화입니다.
알라딘: 30년이 지난 다음에 '이런 모습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화상이 있다면?
토마: 그동안 작업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건 삶을 구성하는 몇 가지 중 일부라고 여기고 진지하게 집중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지난 여름 무렵, 이대로 지금까지의 자세로 대충 주어진 대로 살다간 제가 좋아하는 그림에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단단함, 주제의식 확고한 모던한 감각들에 다다를 수 없겠다 하고 정신이 들더군요.
내적으로 제 자신이 만족하고 납득할 수 있고 보는 이들에게도 작게라도 도움이 되는 (감성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요)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좀더 진지하게 구축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장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다양한 곳에 접목 가능한 그림을 그리는 현대작가가 되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알라딘: 영화나 음악에도 관심이 많으시다면, favorite를 하나씩 꼽아주실 수 있으세요.
토마: 영화는 우디 앨런의 '한나와 자매들'을 정말 좋아해요. 치졸하지만 귀여운, 낭만적이지만 치사한 이야기에요. 저는 이런 게 좋아요. 음악은 morrissey의 'first of the gang to die' 들을 때 마다 만감이 교차하는 노래입니다. 하루에도 꼭 세 번씩은 들어요.
알라딘: 알라딘은 서점이라서요. 이건 빠뜨릴 수 없는 질문인데...(웃음) 최근에 읽은 책 중 주변인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요?
토마: 최근엔 데이빗 호킨스의 <의식혁명>을 읽고 있어요. 선배님이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셨는데 나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에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하이스미스의 단편들. 아찔하게 섬세하고 예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