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회의 나선을 그리는 동안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의 위상은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소비 사회의 풍요 속에서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커지고 디자인 제도도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갔다. 이제 디자인은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면서 뭔가 심대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소비 사회와 디자인의 화려한 기표와는 달리 정작 내가 살아가는 일상은 매우 거칠고 메마르며 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이라는 말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데 일상은 바로 코앞에서 알몸을 뒹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 나는 우리의 현실이 양극화되어 있음을 느낀다. 제도와 현실, 공식적 담론과 일상적 실천, 전문 영역과 대중적 삶의 극단적인 분리와 배신을 나는 한국의 디자인에서 본다. 화려한 디자인과 누추한 현실, 이 둘을 동시에 긍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하나의 편에 서야 한다. 현실은 나에게 당파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나는 디자인 제도가 아니라 '현실'의 편에 설 것을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