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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문학일반

이름:이혜경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0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보령

최근작
2021년 3월 <사소한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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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걷다가, 문득

오래전 인도양의 한 섬에서 홀로 바닷가를 거닐던 때였다. 관광지가 아니라서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해변이었다. 맑은 바닷물 속에서 헤엄치는 열대어는 하늘빛보다 더 파랗고, 소라껍질을 집 삼아 드나드는 게의 눈조차 파랬다. 몸 빛깔이 파란 외계인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느릿느릿 걸었다. 해풍 때문에 셔츠가 배의 돛처럼 부풀어오르고, 셔츠 호주머니에 주워 넣은 조개껍질 두 개가 쟁강거리며 풍경 소리를 냈다. 열대의 태양으로 미적지근해진 바닷물이 발목을 간질였다. 바위 몇 점을 제외하곤 온통 수평선만 보일 뿐인 해변을 걷는데 문득 말이 차올랐다. 참 행복하구나, 나는 행복한 순간들을 남들보다 많이 누리는구나……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행복은 물러나고 그 자리에 사람들이 들어섰다. 이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산문집 교정을 보자니, 다시 그 해변에 선 듯하다. 그동안 만났던 인연, 머물렀던 순간들, 그럴 때 내 마음에 스친 무엇들…… 크고 작은 깨달음을 준 그 인연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새록 밀려와 따뜻한 물처럼 발을 적신다. 물론 바늘 끝 하나 꽂을 자리 없이 딱딱하게 오그라들었던 순간들도 있었고, 그만 길에서 내려서고 싶은 순간도 없지 않았으나, 사람과 생은 내겐 여전히 경이롭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만큼 생명 있는 것들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에도 자주 눈길이 머물렀으나, 놀라운 장면을 본 아이가 저도 모르게 입을 헤벌리듯, 삶이라는 길을 걸어오며 그런 표정을 짓는 순간이 잦았음을 내가 쓴 글을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그건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꽃그늘 아래

어떤 이에게는 무심코 마시는 커피 한잔 값에 지나지 않는 책 한권, 그러나 자신을 위한 책 한권을 마련하는 일에도 짧지 않은 주저와 망설임을 거치는 당신이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런 당신이 하고많은 책 가운데 이 책을 집어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등줄기가 시리다. (...) 불행히도 책은 가전제품이 아니라서 애프터써비스가 불가능하다. 다만 지금 이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

틈새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내 꿈은 거창하고 야무졌다. 딱 한 권 분량의 장편 세 편쯤, 소설집 세 권가량. 게다가 용기가 생긴다면 산문집 한 권 정도. 그다음엔? 신발 벗어서 머리에 얹고 훌훌 떠나리라. 어디로? 구름이 허리께에 걸친 산자락으로 숨어들든 저자로 스며들든 무슨 대수랴. 그럼 사는 건? 들에 핀 풀꽃도 입히시고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여 살리시는 그분이 돌봐주시겠지. 신발만 보면 물어뜯고 싶어하는 강아지처럼 내가 쓴 글만 보면 뜯어고치려는 본능으로 문장을 고치고 제목을 바꿔가며 세번째 소설집의 교정을 보던 어느 날, 하필 그때의 다짐이 떠올라 얼굴 붉히며 무안한 웃음을 지었다. 곧 죽어도 폼에 살고 폼에 죽으려던 그 푸른 시절엔 몰랐다. 내가 꿈꾼 그 세 권의 소설집을 얻기 위해서는 여섯 권, 아홉 권,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분량의 소설을 써보아야 한다는 것을. 여기 실린 글을 쓰는 동안, 세월의 변죽만 울리는 맹문이들을 보다 못해 저 위에 계신 분이 마련한 '인생 집중탐구 단기 속성반'에 들어야 했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낸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내 속에 내가 그렇게 많았다니! 진창길을 걷듯 버거웠지만, 그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었을 것들에 겨우 눈을 뜨게 되었다. 고맙다. 그래? 그럼 한 번 더 해볼까, 하고 물으신다면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뒷걸음질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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