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장은 산중 비알밭이다. 농사철이면 비 오는 날만 빼놓고는 거의 매일 출근을 한다.
며칠 전에는 쇠스랑으로 하지감자 심을 밭을 장만했다. 한참 동안 땀을 흘리는데 곤줄박이 한 마리가 찾아왔다. 가까운 감나무 가지에 앉아 내게 열심히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내 귀는 어둡고 때가 너무 많이 묻어서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 작은 새가 내게 꼭 할 말이 있어 여기 먼 곳까지 찾아와 지저귀는데 나는 듣기만 할뿐 한마디 대꾸도 못했다.
시 공부를 반백 년 하면 무엇하나. 어린 곤줄박이 말 한마디 알아듣지 못하고, 아침이슬 길에 반갑게 웃어주는 손톱만한 들꽃의 이름을 모르고 살았으니 미안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공부하고 절망해야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날이 올 것인가.
2015년 봄
며칠 전에 입추가 지나갔다.
거만한 겨울이 지축을 울리면서 뒤따르고 있다.
내가 다스리는 작은 나라에 사는 푸른 목숨들은 서둘러 열매를 익히는 중이다.
지난여름은 얼마나 목마르고 그립고 뼈아팠던가.
땡볕 아래서 쇠스랑으로 밭을 갈고, 씨 뿌리고 거름을 주는 일, 무서운 병충해와 싸우면서 살아남았다.
잎이 떨어지고 눈보라가 칠 것이다.
삭막한 땅을 햇솜 같은 흰 눈이 덮어줄 것이다.
멍든 희망을 끌어안고 따뜻한 이불 속에서 다시 잠들 것이다.
겉보리 씨 한 바가지 부드러운 땅에 묻는다.
여기 거룩한 곳에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 아직도 살아 있음을 하느님께 알릴 것이다.
흰 눈밭에 파란 보리싹, 그 질긴 뿌리를 언 땅에 내리고 한 백 년만 더 살고 싶다.
2021년 가을
박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