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과 클리셰에 대해 오래 생각해봤다. 세상에 대해 한 말씀 할 자격이 내게 있는 걸까. 건방은 아닐까. 또한 말씀의 백화제방 시대에 이미 마르고 닳도록 외쳐진 클리셰, 상투어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한마디를 보탤 수 있는 자격과 이유를 곰곰 생각해봤지만 마땅한 답변을 찾지는 못하겠다. ...세상의 겉은 초절정 메가패스 속도로 흘러가고, 그래서 불과 몇 해 전 황우석 교수 일도, 몇 달 전 조승희의 어두운 눈빛도 금방 옛날 일처럼 여겨지건만, 그에 반응하는 우리 자신은 별로 변함이 없다는 문제제기가 이 칼럼집의 존재이유라고 해둔다.
이 무목적적이고 무지향적인 책읽기에 굳이 변명을 안겨준다면 '실용에 대한 반발'이라고나 할까.
'지식검색'으로 순식간에 온 세상의 의문을 다 풀어버리는 세상에서 기나긴 페이지의 살결을 더듬으며 우회하는 방법은 분명 비실용적이다. 더불어 잘사는 요령을 한입에 떠먹여준다고 장담하는 실용서적을 애써 피하고 고전적 태도로 씌어진 책을 선호하는 것 역시 비실용적일 것 같다. 그러나 삶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실용적인 것이 종국에는 가장 쓸모없더라고.
나는 이 독서집이 시간의 공허를 견뎌내지 못하는 어떤 자가 페이지의 첩첩산중을 넘나들며 견뎌낸 흔적으로 읽히기를 소망한다. 아니 공허할 틈조차 없는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내 공허에 동참하기를 꿈꾼다.
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행동은 커피 볶아 마시고, 오디오 건사하고, LP 닦아 트는 일인데 그걸로도 한 생애가 흘러간다. 이 책에 담긴 작업실의 일과는 일테면 '어쩔 수 없이 현실 세계에 속해 있으나 현실을 멀리멀리 떠나가고 싶은 사람의 생활 보고서'라고나 할까.
나는 이 책이 음악책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밤하늘의 달에 음악을 비유한다면, 이 글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손짓에 수많은 표정이 있고 욕망의 몸부림이 있다. 그것을 인생이라고 번역해도 좋으리라.
음악을 사랑했고 거기에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맡겨온 셈이지만 궁극적으로 음악은 없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물리적 시간을 넘어서는 의미의 시간, 아프도록 충만한 인생의 시간이 바로 음악듣기였다. 그런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내게는 우연히, 그리고 숙명적으로 음악이었지만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로 바꾸어 읽어도 상관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