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나에게도 유천(乳泉) 같은 그 무엇 하나가 있었으면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퍽이나 부러워한다.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는 게 일이라니...."하면서.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음식을 즐기는 것과 취재하는 것은 다르다. 강릉 초당으로 순두부 취재를 갔을 때의 일이다. 순두부를 쑤기 시작하는 새벽부터 이집 저집 다니며 순두부 맛을 보기 시작하여 오후 5시쯤 취재가 끝날 때까지, 순두부만 무려 여섯 그릇을 비워야 했다. 배탈이 났음은 물론이고 이후 두어 달 간은 두부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렸다.
언양 불고기 취재를 갔을 때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불고기만 먹고서는 한밤중에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고, 자갈치 꼼장어 취재를 하고 난 다음에는 사나흘 간 입 안에서 나는 꼼장어 냄새 때문에 뜻하지 않은 다이어트를 하기도 했다.
내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불행하게도, '맛 칼럼리스트'라는 직업은 음식을 즐기는 것을 오히려 방해한다. 모처럼 맛있는 집을 하나 발견해 내서 그 맛을 즐기려고 식탁에 다잡아 앉는 순간, 거의 무의식적으로 직업 의식이 발동한다.
입 안으로 음식이 들어가면서 머리 속은 벌써 취재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소문나 버린 집일까? 역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 맛은 독특한데...어떤 향신료를 썼지? 주변에 같은 음식을 내는 식당은 또 없을까?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더 맛있지 않을까?...'그러다보면 입 안의 그 맛난 음식은 어느새 까끌까끌한 취재거리로 바뀌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제발 날 부러워하지 말지어다.
또 하나, 내 주변 사람들에게서 흔히 듣는 말. "먹어 본 것 중에 뭐가 제일 맛있었어?" 이는 한우고기, 젖소고기, 수입 쇠고기조차 구별 못하는 내 미각 수준을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다. 그리고 그 많은 음식들 중에 어떻게 순위를 매겨 '이게 최고의 맛!'하고 도장을 꽝꽝 찍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 차 문화의 거봉인 초의 선사는 그가 기거하던 전남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샘물을 젖맛이 난다고 하여 '유천(乳泉)'이라 부르고, 최고의 맛이라며 자랑이 대단했다고 한다. 젖 맛이라...여러분들은 젖 맛이 어떤지 알고 있는가. 어떤가 하면, 놀랍게도 밍밍하고 느끼하고 비릿한, 한 마디로 '맛이 없다'(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기회가 닿으면 개인적으로 질문해 주시라.) 그럼 초의 선사는 젖 맛을 몰랐을까? 왜, 그 맛있는 물이 솟는 샘에다가 하필이면 유천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동물학자 데스몬드 모리스의 <접촉>이란 책을 보면,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행복하고 안락한 느낌을 받는 순간은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빠는 때인데, 인간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 행복과 안락함을 다시 맛보기 위해 사랑을 한다고 적고 있다. 다 큰 남녀가 사랑 놀이하는 것을 보라.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서로 껴안고 빨고 깨물고 간지럽히고....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하듯이 하지 않는가.
초의 선사는 어머니의 젖을 빨고픈, 즉 어머니가 주는 따스함과 행복, 사랑 등등의 맛을 보고 싶다는 의지를 '유천'이란 이름을 빌어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초의 선사의 유천처럼 나에게도 최고의 맛, 사랑을 맛보일 수 있는 그 무엇 하나가 있었으면 싶다. 그래서 이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신 모든 이들에게 그 맛을 보여주고 싶다. 특히 나에게 까탈스런 입맛을 물려주신 어머니께...
이 책은 47년간 살아오면서 내가 먹고 마셨던 것에 대한 기록들로 채워져 있다. 내 삶은 대한민국의 평균적 인생을 넘지 않는다.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한민국 평균의 벌이를 하며 수도권의 베드타운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먹었던 음식들은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먹었고, 지금도 먹고 있는 음식들이다. 이런 자질구레한 음식들에도 문화가 깃들이어 있음을, 우리의 사랑이 묻어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느끼게 된다면 나로서는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음식은 그냥 음식일 뿐이라 여기는 독자들에게는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책값으로 맛있는 음식 한 그릇 사먹는 게 낫다. 라면땅 한 봉지에도 아름답고 행복한, 또는 눈물겹게 슬픈 삶이 담겨 있다고 믿는 독자들과 이 글들을 함께 읽고 싶다. 그들에게 이 책이 초라하지만 행복 가득한 만찬이 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