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벼랑길 앞에서어쩔 줄 몰라 하던 날들도 있었다. 그토록 몸 사리던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 늦은 조객처럼 하릴없이 회상의 영지에서 주억거리고 있구나. 다정도 병인 양, 조울증을 달래 줄 엑스터시를 찾아 원고지 연옥을 떠돈 지 어느덧 십수 년. 이 유령의 삶에서 행불행의 여부를 찾는다면 그때부터 허무는 시작되리라.
독자여, 그냥 하던 말이나 계속하라.
『어묵 파는 칠남 언니』는 셀픽션 작품집이다. 우리 주변에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빛나게 만드는 분들도 있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은 채 절망의 늪에 빠져 사는 분들도 있다. ‘칠남 언니’는 특이한 이름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면서 멋진 삶을 개척해 나갔다. ‘칠남’이라는 이름은 자신을 향한 세계의 명명인 동시에 세계를 향한 스스로의 끝없는 질문이었다. 우리는 이 간절한 목소리에 감동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 번째 문학평론집 『운명의 시학』을 엮는다. 2003년에 간행한 『문학의 미로』, 2009년에 간행한 『자연과 동심의 시학』에 이어 나오게 된 이번 책은 2009년 이후에 발표한 글을 중심으로 엮었다. 유행하는 풍조나 이념을 좇기보다는 작품 자체에 대한 세심한 분석에 힘쓰는 것이 내 비평적 글쓰기의 신조이다. 이는 내가 서구 철학이나 사상에 그리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문학 작품은 그 철학과 사상이기 이전에 문학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의 결과라 할 수도 있겠다.
제1부 ‘낭만과 역설’은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시인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하였고, 제2부 ‘성찰과 상상’은 동시대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남성 시인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하였고, 제3부 ‘실존과 신생’은 역시 동시대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 시인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제4부 ‘유랑과 승화’는 방(房) 소재 시, 디카시, 근대소설, 연극 등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하였다. 각 부의 제목은 그 부에 실린 글의 제목에서 발췌해서 만들었는데, 엮고 보니 이번 평론집도 시와 시인에 관한 논의를 위주로 하게 된 셈이다.
이번 저서를 위해 글을 모으면서 시인의 삶과 운명에 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어떤 사람이 시인이 되는가. 훌륭한 시인은 어떤 시인을 뜻하는가. 시인은 시인이 아닌 사람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시인이 된 사람은 그 길을 쉽게 버리지 못하면서 평생 시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시인은 무엇을 위하여 시를 읽고 쓰는가. 이러저러한 질문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갈 때 불현듯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삶의 난관 같은 것에 봉착하여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할 때마다 나의 화두가 되는 단어가 이 운명이기도 하다. 운명이라는 단어만큼 무모한 동시에 황홀한 말이 있을까. 시인은 운명적으로 시를 만나고 운명적으로 시를 쓴다고 생각할 때 여러 가지 의문들이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도 이번 평론집의 제목을 ‘운명의 시학’이라 붙였다.
1998년에 등단한 이후 문단 생활을 하면서 훌륭한 시인들이 발표한 좋은 작품을 만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모호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들의 내면구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상상력을 따라가고자 부단히 애를 쓰기도 하였으나 이런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나의 해석은 언제나 명명백백한 오독이 아니었을까 걱정이 든다. 무모하기까지 했던 내 비평적 글쓰기가 이분들의 작품에 누가 되지 않았기를 바랄 따름이다. 역시 비평 작업은 어렵고 또 두렵다.
가장 고마운 분들은 이 책에 실린 시인이다. 이분들의 존함을 한 분씩 조용히 읊조려 본다. 때로는 내 마음을 황홀하게 사로잡기도 하였으며, 언제나 내 삶의 의미를 충만하게 만들어주었던 분들이시다. 너그러이 나의 오독을 받아들여 주신 분들이기도 하다. 여기에 실린 시인들 외에도 고마운 분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분들의 조언과 격려가 없었다면 아둔하고도 둔중한 이 발걸음을 어찌 예까지 끌고 올 수 있었을까. 그분들이 주신 크나큰 사랑과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괴물 같은 자본의 힘이 이다지도 비대해진 타락의 시대에 정신의 고고함을 잃지 않고자 분투하는 가난한 시인들에게 삼가 이 책을 드리고 싶다.
『피리 부는 엘리베이터』는 시나리오 작품집이다. 세 편의 시나리오 모두 우리 시대의 현재 진행형 이야기들이다. <피리 부는 엘리베이터>는 승강기 교체 문제를 둘러싸고 이웃 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밤이 오는 캠퍼스>는 전통적인 예술 관련 학과들이 사라지는 대학가의 현실을, <소주방 세레나데>는 코로나 시대의 방황하는 청춘들의 생존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책이 우리 시대의 현실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