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싹하고 소름 돋는 느낌의 정체는 뭘까?
어릴 때부터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공포 소설을 즐겨 보고는 했다. 매년 여름, 밤이 되면 오싹한 이야기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괴담을 찾아 읽었다. 그러고 나서 밤에 악몽에 시달리다 깬 적도 많다. 사실 그 정도로 무서워하면 무서운 이야기 같은 건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되는데, 호기심은 늘 공포를 이겨 먹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어쩌면 공포나 호러라는 장르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이 장르를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로 무섭지 않다면 그건 보는 이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아주 조금은, 이런 걸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찾아서 보는 거라고. 오싹하고 소름 돋는 그 느낌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 오싹하고 소름 돋는 느낌의 정체는 뭘까? 이 연작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쓰면서 이 질문을 자주 생각했다. 무서운 이야기를 쓰려면 무엇이 나를 무섭게 하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어쩌다 보니 《세 번째 장례》가 내가 쓴 세 번째 책의 제목이 되었다. 〈세 번째 장례〉가 표제작이 될 줄은 몰랐기에 의도한 제목은 아닌데(참고로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세 번째 엄마〉였다) 하지만 어쩐지 의도한 것 같고. 별것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우연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이 소설을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에게 바친다.
엄마는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나중에 나 아프거든 난 절대 연명 치료 같은 거 시키지 마. 그런데 정작 그런 상황이 오면 나는 엄마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엄마, 그러니까 오래오래 살아.
...2019년 폴라리스 워크숍에 참여하며 쓴 〈앨리스, 스탠드 업〉이 활자가 되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앨리스, 스탠드 업〉을 최근에 다시 읽고 나서야 알았다. 3년 전 소설을 쓰던 그때 화장실에 갇혀 있던 건 나였음을. 이 글을 쓰고 나서야 나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드림 레플리카〉를 쓰면서 계속 생각한 문장이 있다. 메모장에 적어둔 그 문장을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깟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깟 고양이 한 마리를 위해 바뀌는 세상을 원한다.’
고양이 한 마리를 위해 바뀔 수 있는 세상이라면 좀 더 살만하지 않겠는가, 하고.
2022년 가을
편견으로 가득 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가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물론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사람’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혹은 일정한 자격이나 품격 등을 갖춘 이. 이와 같은 정의로 본다면 외계인 역시 인간 혹은 사람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사회를 이루어 살고 있다면. 실제로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우리가 그들을 인간으로 대접할지 어떨지를 떠나서 말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 바깥, 그러니까 외부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외계인이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들은 과연 우리와 같은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할까?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작중에서 외계인이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연민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심지어 뇌도 심장도 없는 해파리마저도) 똑같은 윤리적 고려의 범주로 통합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한마디로 자기가 속한 종의 범위를 넘어 공동체를 확장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이 기준을 따르자면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사람이 되었다가 못 되었다가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들이 기준을 가지고 나눈다는 점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와 똑같은 짓을 되풀이할 수도 있는 오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실제로 이 소설의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종차별주의자가 있다).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외계인을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라는 존재를 있는 힘껏 이해해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며 나도 이해할 수 없었던 누군가를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계속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알 것 같다는 느낌, 그러니까 실마리나마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동시에 어떤 사람은 그렇게 떠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외계인이 내 삶에 침입해 들어온 것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