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다를 읽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과제다. 니시다가 믿었던 지애(知愛) 일치설에 따르면, 사랑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가 없으면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의 글 어디에도 조선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은 필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존재였을 것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존재이니만큼 공감이나 감정 이입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을 중앙에 모신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세상이 하나)라는 슬로건은 조선과 중국의 타자성을 근원적으로 박탈하고 말았다.
필자는 하지만 이 책에서 일본인 니시다에 대하여 그가 다 못 한 지애설을 실천에 옮기면서, 알기 위해서 사랑하려고 했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이해가 나와 우리에 대한 자기 이해를 심화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분노》를 자비로 안내하며
분노의 대한민국, 성난 시민! 이 책을 번역하고 있던 2016~7년 한국의 겨울을 단적으로 묘사하던 말이었다. 대다수의 언론은 촛불시위를 보도하면서 분노의 자연스러움, 정의로움, 당당함을 지적하며 수없이 분노를 예찬했다.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의 법 위반과 국민의 신임에 대한 배신을 고려할 때, 분노하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이라고도 했다.
우리는 하지만 경험으로 분노가 유용하면서도 위험한 감정임을 잘 알고 있다. 잘 다루면 그 에너지를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잘못 다루면 증오, 저주, 파괴와 살인, 아니 전쟁의 나락으로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수많은 현자들이 그 위험성을 지적해왔고, 우리 언론 역시 최근까지도 분노를 잘 조절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분노의 순기능을 인정한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하나로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나 친지가 모욕을 당했을 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 자기방어도 하지 못하는 노예 같은 사람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 철학자는 화를 낼 때 다섯 기준은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분노하기에 마땅한 일, 분노하기에 마땅한 상대, 분노의 강도(强度), 분노의 타이밍, 마땅한 지속 시간이 바로 그것들이다. 다섯 기준은 이성에서 온다. 분노라는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잘 유지하면 ‘중용의 성격’을 지닌 자로 칭송받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런데 힌두교와 불교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분노에 대해 아주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특히 불교는 분노[진瞋]를 무지와 탐욕과 함께 삼독(三毒)의 하나로,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런 불교의 입장에서는 비록 ‘공분(公憤)’이라고 해도, 그것이 증오나 폭력을 초래한다면 거기에 동조하기 어렵다. 1950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동부 티베트로 침공해온 이후 인도로 망명해온 14대 달라이 라마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마오쩌둥을 포함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분노 대신 자비를 보낸다고 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대영 제국과 인도 내부의 카스트 제도라는 정치적?사회적 악에 대해 힘껏 저항하고, 힌두 무슬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목숨 건 단식을 감행하면서도, 분노를 정당화하는 일을 극히 경계했다.
달라이 라마의 제자이자 친구인 서먼은 《분노》에서《입보리행론》 <인욕품>을 번역하고 해설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분노에 대한 불교적인 태도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나는 원수와 함께 인내를 수련할 수 있네.
그래서 그는 그를 인내한 결과인
내 첫 번째 공물을 받을 만하네.
원수야말로 인내의 원인이기 때문에.《입보리행론》 <인욕품> 108
서먼은 이 책에서 ‘원수가 인내의 원인이므로 나의 공물을 바칠 만하네’라는 취지의 구절을 설명하면서,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와 티베트 지도자, 티베트 국민들 최대의 적인 마오쩌둥에 대해 수십 년간 명상한 것이 그 취지를 잘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로 언급하고, 문답 하나를 덧붙이고 있다. 아시아 협회(Asia Society)에서 한 번은 달라이 라마에게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의 사도인 간디뿐만 아니라, 폭력의 사도인 마오쩌둥, 티베트의 자유와 사원 등 불교 기관들, 그 환경과 백만 명이 넘는 티베트인들을 파멸시킨 마오쩌둥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인욕품>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그래서 인내가 길러지는 것은
가슴에 증오를 지닌 자들에 의존해서다.
증오를 지닌 자들은 정법正法처럼 존경받을 만하네.
둘 다 인내의 원인이므로.《입보리행론》 <인욕품> 111
“증오를 지닌 자들은 정법처럼 존경받을 만하네.” 얼핏 황당해 보이는 이 구절에 대해 서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 진정한 붓다의 마음, 평등성의 지혜-증오로 가득한 마음과 정법을 평등하게 보는 지혜-가 있다! 여기에 관용이 없는 자를 인내하는 관용이 있다. 여기에 증오에 답하는 사랑, 악에 답하는 선善이 있다.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위대한 영적 인물들과 신들의 영역이다.” 증오로 가득한 마음과 정법을 평등하게 보는 지혜, 그 지혜를 얻은 경지를 서먼은, 위대한 영적 인물들과 신들의 영역으로, 곧 진화의 극점으로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붓다, 간디, 달라이 라마는 진화의 극점에 도달했거나, 아주 근접한 인물로 보인다. 서먼은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진화하여 자력으로 완전한 불성(佛性)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진화의 극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같다. 수많은 다생(多生)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이 책은 결국 분노의 에너지를 정복해서 자비의 에너지로 바꾸자고, 그 에너지를 재배치하자고 한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분노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 다른 이들이 고통을 겪지 않고 행복해지도록 도우려는 의지를 발동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비와 사랑으로 당장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너무 심하게 다그치는 것이다. 그래서 <인욕품>과 서먼은 내성(耐性)?인내? 자제?용서라는 중간 지대를 제시하고 있다. 해를 입었을 때, 또는 해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증오심과 분리된 자비심을 내는 것이 목표이지만, 그 전에 증오에 대한 내성을 키우고, 인내와 자제심을 기르자는 것이다.
분노 대신 사랑과 자비를 닦으라는 <인욕품>, 달라이 라마 그리고 서먼의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 민족은 분노에 대해 상당한 친근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이런 친근감은 침략과 불의에 대한 저항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을까? 변영로의 시 논개(論介)의 첫 소절이 그런 연관성을 짐작케 한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거룩한 분노 - 궁극적인 자기희생을 수반하는 이런 분노에 대해 달라이 라마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그는 중국의 침략과 지배에 항의해서 분신자살한 티베트인 스님들과 소년들의 행위에 대해 평가하기를 참으로 난처해했다. 하지만 권장하지는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간디나 달라이 라마처럼 서로 ‘원수’를 용서하라고 말하면 대다수는 무골충이라고 욕할 지도 모르고, <인욕품>에서처럼 증오를 지닌 자를 정법처럼 존경하자고 하면 분별이 없는 자라고 비난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분노》는 달라이 라마를 닮으라고 하는 것 같다. 우리가 그를 닮아서 자비가 분노를 이긴다는 진화의 극점에 가까워지면, 왜적이 백성을 살육한 일에 대해 이순신이 느꼈다는 원통한 분노[痛憤], 논개의 거룩한 분노, 그리고 2017년 탄핵을 이끌어 낸 시민의 분노를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한국인을 위한 감정교육의 첫걸음은 분노 성찰이 아닐까 한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분노》를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