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은 하나의 도전이다. 인물이 되었건 작품이 되었건 하나의 문학사적 사실이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다면 그 인물과 작품은 충분히 행복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사에서 그런 지위에 오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하나의 문학사적 사실이 후대 사람들의 삶과 의식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늘 새롭게 육박해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김수영이 바로 그런 존재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이제 36년이 넘었지만, 그리고 그에 관한 더이상 새로운 자료도 나오기 힘든 상황이지만,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마치 바로 어제 씌어지고 오늘 발표된 것처럼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그는 아직도 하나의 당면문제로서 제출되어 있는 것이다.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이라는 일견 단호해 보이는 제목을 얹었다. 그러나 사실 이 책에 단호한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자명한 것은 대개 단호한 것이니까. 그러므로 이 제목의 취지에 충실하자면 ‘결별’ 선언조차도 자명해서도 단호해서도 안된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의 제목에는 자명한 것들과 결별했다는 과거형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결별하고 있다는 현재형, 결별하고 싶다는 원망형, 심지어는 결별해도 좋을까 하는 유보형까지 두루 들어 있다고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내 지나간 젊은 날들은 분명 견고하고 자명한 것들에 주박(紂縛)되어 있었다. 그것은 즐거운 주박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즐겁지 않다. 그렇다고 답답해 못 견디겠다거나 지금 당장 드는 칼로 그 밧줄을 단번에 끊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안에서 더이상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때론 즐겁지 않아도 견뎌야 할 일도 있는 법이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 이 주박을 주박으로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바라봄은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한다. 어쩌면 남은 생 전체를 다 바쳐도 이 바라봄은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바라봄 자체가 하나의 운동성을 지니고 무엇인가를 결과하게 될 수도 있다. 조금만 더 기다리도록 하자.
하지만 기다림이란 나태의 다른 이름일 수가 있다. 나는 요즈음의 내 글에서 그런 기미를 읽는다. 내가 그렇게 읽을진대 남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처음엔 방법이었던 에두름과 유보가 나중에는 태도가 되고 마침내는 숙명적 장애가 될 것이다. 그것은 무섭다. 무섭다면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