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고 난 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크리스천이라면 결코 한두 시간의 예배 출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계속 그분을 알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진다. 또한 그러한 크리스천이라면 교회 안에서 잠깐 거룩한 척하다가 축도가 끝나면 세상으로 나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의 일 좀 한다고 교회에서 생색내거나, 헌금을 드리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일삼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참된 크리스천이란 그의 소유 전부를 이미 주님께 드린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들의 믿음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가 자부심이 될 수 없다. 지적으로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도 소용없다. 오직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 살아 있는 믿음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저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사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사역하고 큰 이름을 남겼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셨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혜를 벗어나게 되면 나의 옛 자아가 꿈틀거리며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신앙생활에 불평이 생기고, 주님께 드린 헌신과 믿음을 계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의 권리와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외모와 조건, 인간적인 공로와 인정을 중요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외면적인 생활보다 내면적인 세계에 민감해야 하며, 그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선배들이 초심을 잃지 않았던 풀타임 크리스천의 삶의 비밀이었다. - 나가는 말에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주 감당할 수 없는 재난과 조우하곤 한다. 그 고난이 우리의 가던 길을 멈추어 서게 하고, 과거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게 할 때가 있다. 그 시간 안에서 자신을 직면하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우며 외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고난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며, 연단된 금처럼 영혼을 빛나게 한다.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저 피상적인 인생만 즐기고 낭비하며 살았을 테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은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내용과도 같다. 아니, 하나님은 잘되는 일과 잘 안되는 일을 통해 하나님 당신의 뜻을 성취하신다는 뜻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하나님의 모습과는 다르다. 거룩한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성공뿐 아니라 어려운 시간을 통해서도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끄럽지만 나의 삶 또한 그러했다. 나는 목사이면서 분주하고, 쫓기고, 정신없이 살아가던 때가 많았다. 나의 평범한 일상과 하루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가치를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교회가 제공한 지난 2개월의 안식 기간을 통해 질주하던 내 모습을 내려놓고 모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나의 삶을 다시 생각하면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해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 시계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의 삶이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모두 완성해 가시는 드라마와 같은 것이 틀림없다. - 들어가는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