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본적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지만 이 책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화환경(이것은 이미 정치환경보다 더 폭 넓고 근본적인 환경이다)을 문학이, 그리고 예술이 어떻게 관통할 것인가만을 논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환경과 문학ㆍ예술적 상상력의 전망이 어떻게 (이미) 어우러지고, (앞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어우러져야 할 것인가를 미학적으로 규명해 보려는 것이 더 긴박한, 그리고 일상적인 과제였다. '21세기의 첫 일'이라는 부가 따로 마련되어 있기도 하지만, 책 전편에 그런 내용의 흔적들이 들어 있는 것이 내게는 가장 다행스러운 대목이다.
이것은 서로 연락은커녕 서로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남길 수단도 시간도 없이 고문 속에 거의 같은 시간에 각각 따로 죽음을 맞는 두 연인의 상대를 향한 사랑의 심경과 육체 상태를 다룬 이야기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살아남은 이야기가 문학의 자연이라면 이런, 죽음을 스스로 겪는 방식으로 죽음을 위로하는 이 제의는, 말 그대로 문학의, 이야기의, 인위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을 하게 해주었다’는 강제의 배려 또는 배려의 강제를 담은 표현이라는 것이 내게 요즘 드는 생각인데, 이 이야기는 문학동네 강태형 사장이 쓰게 ‘해주었다’는 말을 특히 하고 싶다.
'대저 500년 동안 대중문화는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강력하며 영원하다'는 구절을 읽고는 무턱대고 감동했던 생각이 난다. 대중 혹은 자기 속으로의 '열광적 죽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중과 자기를 관통하면서 그 관통으로써 아름다움의 미래 전망을 빛 발해야 한다.
기존의 선집에서 흔히 빠지는 주요 장시들을 거의 모두 수록했고 주요 시인들마다 소(小)시집 이상의 지면을 마련하였다. ‘두이노’는 흩어놓았고 ‘오르페우스’는 모아놓았다. 너무 일찍 횡사한 재능은 죽음이 끔찍해서 유작들을 흩어놓기가 힘들다. 하여, 『독일시집』. 내가 정한 제목이지만 마음에 든다. ‘독일 시선집’이 아닌 것이. 이만한 분량인 것이. 이런 분량의 독일 시선집은 해외에 얼마든지 있지만 이러한 구성의 ‘독일시집’은 내가 알기로 없다.
새천년 첫해 벽두에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머문 기간이 짧았지만 곧, 서울에 있는 듯 익숙해지고, 익숙함이 신기했다. 그리고, 신기함은 이어진다. 하노이를 떠나온 지 1년 반, 5백 년 묵은 서울에서 언뜻, 하노이가 익숙하고, 신기하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베트남 작가들, 특히 시인 휴틴과 듀앗, 그리고 소설가 바오닌에게 이 <하노이 서울 시편>을 바친다. 부디, 전쟁의 슬픔이 무르익어, 해방과 평화의 기쁨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