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책 잘 만드는 책>을 만들고자 기획해서 초판을 만들기까지 3년을 준비했다. 이 책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남을지ㅡ적어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 출판 시장의 열악함을 알리라ㅡ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꼭 필요한 곳에서 꼭 필요한 만큼만 사용해주었으면 대만족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책 한 권 정도는 꼭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나 자신이 쓸 만한 매뉴얼 하나 기초교재 하나 없는 출판업계에 몸담고 있다는 부끄러움에 기인한 책임감이 컸다. 쑥스럽기는 하지만 <책 잘 만드는 책> 을 내는 데 그러한 소명의식이 가장 주요한 연료가 되어주었다는 점을 숨길 생각은 없다.
그 후로 <책 잘 만드는 책>은 출판 관련 전공학과를 가진 여러 학교에서 교재로 채택되었다. 이미 경희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충북대학교, 신구대학, 서일대학, 계원예술대학, 혜천대학, 김포대학 등의 전공학생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나름대로 세상에 필요한 일을 했다는 자부심에 용기를 얻은 나는 이번 <책 잘 만드는 책> 개정판을 준비하며 초판에서 못 다한 이야기 중 하나를 추가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지(韓紙) 특집이다. 종이, 인쇄, 출판 등의 제분야는 찬란하게 빛났던 우리 옛문화의 한 가지다. 그 중에서도 만방에 이름을 떨쳤던 한지에 대한 부분을 삽입했다. 이 또한 독자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문화는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 활판 인쇄 문화는 특히 더 그렇다. 이것이 인쇄의 원형이고 문화이며 전통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화적 역사와 원류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쇄 문화 대국인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숱하게 활자와 활판 인쇄 문화를 계승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왔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기록물을 출판해왔다고 자부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늦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억되고 역사가 된다. 귀한 것은 기록되어 잘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의 흔한 것,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난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괜찮은 것이 있을까.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들이다. 그런데 하물며 세계에서 최초로 활자를 이용해 책을 만들었던 우리나라에서 책 만드는 문화가 가지는 의의는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그래야 기억이 되고 역사가 된다. 귀한 것은 모두가 기록되고 있고 그것에 대한 당위성들을 더해져 잘 보존하고 남겨져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의 흔한 것, 천한 것,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것은 동물만이 아니다. 컴퓨터가 나오기 전 아날로그 방식으로 책을 만들던 시대에 사용했던 책기계와 도구들 또한 멸종위기를 넘어 그 자취마저 감취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
감성과 소통의 예술품, 레터프레스
사진으로 보는 레터프레스는 우리 선배 장인들이 100년 전부터 사용했던 책 만드는 기계들이다. 그때는 자동화된 기계도 없었고, 오직 사람의 손 기술로 책의 의도를 정확히 재현하였다. 주조 기술자, 문선 기술자, 활판 인쇄 기술자, 지형 기술자, 활판 수리 기술자, 석판 교정자, 사진 식자 기술자, 청타식자 기술자, 수제판 기술자, 연마 기술자, 마스터 기술자, 대수조합 기술자, 사철 기술자, 선압 기술자, 양장 제책 기술자, 한식 제책 기술자, 배접 기술자, 수제책 기술자, 도비 기술자 등이 사용했던 책 만드는 기계와 도구를 찾아서 1999년 충무로, 일산, 성수동, 대구, 부산, 광주, 전주, 충청도, 경기도 일대 등 전국에 흩어져 있던 기계들을 하나하나 모아, 닦고 기름 치고, 전문가를 모셔 고치고, 수리하여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어 놓았다. 기계들이 유리관 속에 있는 유물이 아니라 관람객들에게 웅장한 모습으로 가동하여 정확하게 사용하는 원리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한 책 만드는 기계 도록이 아직 출판 시장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고, 인쇄 종주국가에서 인쇄 도감 한 권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결국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계들을 중심으로 작은 결과물을 세상에 내보낸다. 더 멋진 작업들이 이 책을 시발점으로 확장되었으면 한다. 우리 선배들이 사용했던 손때가 묻어 있는 책 만드는 기계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여 다음 세대에 잘 전해지길 기대한다.
한때는 부서져라 제 몸 바쳐 책을 만들고 이제는 서랍 속에 가만히 누워 있는 도구들. 이들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BOOK TOOLS』는 기존 도구집과 다르게 도구의 여러 입면을 실었다. 도구가 좀 더 잘 보이도록 촬영할 수도 있었지만 마치 제품 매뉴얼처럼 보이는 도구집이 되지 않길 바랐다. 108x154밀리미터의 작고 두꺼운 각양장 꼴은 도구가 들어 있는 툴박스(Toolbox)처럼 보이게 했고, 도구가 제힘을 잃지 않도록 최대한 크게 배치하면서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실제 비율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책장을 넘기면 고개를 돌려 다른 얼굴을 보이는 모습, 도구의 쓰임이라는 고정관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도구의 숨겨진 모습이 보인다. 이제껏 책 만드느라 뒤에 숨어 있었을 도구들, 이제 밖으로 나올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