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삶은 주류 지식에서 비껴있기 마련이고, 주류 지식을 민중은 불신하면서도 그 파괴력을 무서워한다. 내 글도 그렇다. 나는, 예를 들어, 고속철도공단이나 새만금사업단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터노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잘 있지 않았고, 나 스스로 만남에의 노력을 별로 행하지 않기로 했다. 즉 불신과 두려움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빈한하게 된 것이 그렇다고 크게 아쉽지는 않다.
다시 말하건대 내가 만난 진실은 내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고, 한없이 진실에 충실하고 싶었고, 불신과 두려움을 직접 맞닥뜨리지 않고도 가차없이 던져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이것이 내 글의 약점이면서 진정한 강점이 되는지 모른다.
이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도 겐자부로가 말한 그런 의미의 청춘소설이다. 나의 경우 소설을 쓰면서 '이건 청춘 소설이야!'라고 이미 생각한 게 겐자부로와 다르다면 다를까. 훗날 내 소설을 내가 다시 읽을 때 나 역시 겐자부로처럼 '어떤 미소와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될지, 아니면...
십이 년 전의 나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어가는 것의 이치를 너무도 몰랐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자로 결정이 되고 난 뒤, 처음 투고하였던 천팔백 매 소설을 거의 일주일 만에 천이백 매 소설을 거의 일주일 만에 천이백 매로 줄인 뒤 최종 원고랍시고 출판사로 넘겨버렸으니까 결국 책은 내 마음속의 오랜 아픔이 되고 말았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아픔이다. 이건 치유를 해야만 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식의 조치를 무수히 취했다. 군더더기 몇 문단을 덜어내기도 했다. 말할 수 없이 통쾌했다. 첫 책 이후 십몇 년 글쓰기를 해오며 깨달은 것은, 나의 경우 초고 작업은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흥분하여 막 토하는 술자리의 열변이나 거침없는 애정고백과 같았다. 그런데 초고 이후의 첨삭 퇴고 작업은 지루하게 기다리며 객관적인 시간을 들여야 하는 노동이었다. 소설이라고 불리지만 실은 그 정체가 시가 아닐까. 딱 그 자리에 그 문단 그 문장 그 단어가 있어야 하는 면에서 시와 소설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하여 나는 사실상 ‘소설시’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