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부터 하종오 시인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지금까지 맺어온 인연이 그리 얕지는 않다. 시 쓰는 방법의 기초와 시 읽는 안목의 기본을 그에게 배웠으니, 그의 시 세계에 관한 글들을 엮는 일이 그렇게 외람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종오 시집이 도서출판 b에서 처음 출간될 때에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 후로 도서출판 b에서 꾸준히 발간되는 여러 하종오 시집에 해설을 썼으니, 도서출판 b에서 나온 하종오 시집들만을 다루어 이 비평집을 엮는다. 언젠가는 그 이전과 이후의 시집들에 관한 비평을 쓰고 싶다.
시는 어떻게 리얼리즘과 접합할 수 있으며, 시는 어떠한 리얼리즘을 지향해야 하는가? 그의 작품 세계로부터 얻은 화두를 한마디로 간추리면 바로 이 물음이다. 시의 주된 소재는 자연 사물이며 소설의 주된 소재는 사람의 삶이기에, 인간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원리는 시보다도 소설에 더 어울린다는 것이 아직도 적지 않은 이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통념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사람의 삶으로부터 가장 시적인 것을 찾을 수 있으며 찾아야 한다는, 어찌 보면 비상식적 고집에 가까운 신념 속에서 리얼리즘과 접합한다. 또한, 올바른 전망perspective을 앞세워야 올바른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껏 암송되는 리얼리즘의 공식이다. 이와 달리 그의 시는 아무리 진리와 멀어 보이는 삶 속에서도 진리를 찾아내고 아무리 진리처럼 보이는 삶 속에서도 진리가 아닌 점을 찾아내며, 따라서 고정된 진리를 변화하는 삶에 적용하는 하향식이 아니라 무한히 다채로운 삶 속에서 끝없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상향식으로 리얼리즘을 지향한다. ‘가장자리에서 지금을’이라는 제목을 비평집에 붙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난날에는 알맞았던 경직된 시야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장소를 가장자리라고 한다. 그곳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지금에 걸맞은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