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가 다녀간 뒤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그건 내가 잠깐 타오르는 불의 근원이거나, 파도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모든 게 순간일 뿐이다. 그런데 너무 할 말이 많으면 일렁이게도 되고, 너무 아프면 반짝이게도 된다.
당신 곁에 눕던 이생의 등뼈, 먼 섬들이 편도처럼 부었다. 나는 중심의 파동을 느낄 때 내 몫의 뿌리를 끌고 갈 것이다.
진짜는 무엇을 변하게 한다. 지나가거라 세계여, 그 잠깐을 사랑했다. 내 운명은 내가 선택할 것이다.
그날 남쪽 항구에는 봄비가 내렸다. 나는 사람들 틈에서 영도다리가 번쩍 들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이 다리에서 첫사랑을 잃었으리라, 멍게에 막걸리를 마시며 항구의 물이랑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행복이란 온전할 때는 느끼지 못한다. 그 감정은 결핍에서 느끼는 갈망이기 때문이다. 충족된 욕구는 더 이상 동기로 작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길 위에 선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여전히 나의 결핍을 보여 주는 게 고통스럽다. 시와 내가 분리되길 원했다. 내 안의 가난과 비루는 끝내 밀봉될지 모른다. 몇 개의 시어詩語들만 입속에서 맴돈다. 그러므로 발자국과 발자취는 다르다.
항구에서 오래도록 물굽이를 바라보며 그리운 이름들을 호명했다. 공복의 바다가 흰 배를 드러내며 죽은 물고기처럼 천천히 뒤집어졌다. 전화를 걸 만한 사람이 없었다.
2018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