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이 한강유역을 서로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던 삼국시대로,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 한강은 반드시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남쪽 수도라는 뜻의 남경이었고, 조선 개국 후에는 새로운 도읍 한양이 세워졌으며,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문화유적을 남겼으며,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부려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고, 일제강점기에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훼절 왜곡시켰으며, 한국전쟁의 참화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유적들은 개발시대의 산업화 논리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버렸습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적인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으로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비록 역사유물은 남아 있지 않더라도 신화, 전설,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풍수지리지 등이 구전과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어 어느 정도는 의존할 수 있겠지만, 그 기록들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두 콘텐츠를 결합한 '이야기가 있는 서울 길'이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인문역사기행에 소박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5시간 정도 걷는 거리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차례의 현장답사를 통해 개발하고 ‘서울학교’ 역사기행을 통해 지난 6년 동안 검증한 콘텐츠들입니다.
서울학교 4기 개강과 함께 그동안 숙제처럼 미루어두었던 여러 동무들의 피땀 어린 성과물을 묶어 책으로 세상에 내놓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6년 동안 함께 길동무가 되어주었던 서울학교 학생 여러분들, 그리고 좋은 사진을 제공해 준 총무 김순태 님께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책은 길 떠나는 이들의 나침반 정도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문화유산의 보고인 서울, 그 길을 함께 나서는 길동무들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입체적인 ‘서울이야기’는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2018년 4월 - 길을 떠나며
다시 길을 떠나며
조선의 도읍지였던 서울은 지금의 행정구역만이 아니라 경기도 일원을 아우르는 권역이었습니다.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그 절대권력이 핏줄에 의해 세습되는 고대국가의 특성 때문에 왕을 포함한 왕족들의 생활권역이 모두 도읍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왕이 거주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왕족들은 도성 안에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왕과 왕족들의 무덤, 사냥 터, 왕족 소유의 많은 별서와 정자, 왕이 도성을 떠나 머무는 행궁은 도성에서 100리 안쪽인 교郊의 지역으로, 대부분 지금의 경기도를 포함하는 곳이었습니다.
해서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은 조선의 도읍지都城인 서울뿐만 아니라 도읍지를 둘러싼 외곽지역近郊인 지금의 수도권에 대한 이야기를 아우르게 됩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도성과 근교가 나뉘지만, 두 곳은 문화적으로 역사공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서울 길’ 첫 권을 발간한 다음에도 길동무들과 쉼 없이 길을 누볐습니다. 우리들이 다시 길을 떠나 만나야 할 문화유산은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첫 권에 담지 못한 코스와 새로 개척한 코스를 묶어 둘째 권을 펴냅니다.
1기부터 4기까지 6년 6개월 동안 학생들과 함께 쉼 없이 달려온 서울학교가 비로소 구색을 갖추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함께해준 여러 길동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조금은 길어질 수 있는 쉼표를 찍습니다.
삶에 조그마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또래의 대부분이 퇴직을 할 즈음에 어쩌다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도자기와 관련된 일을 하며 경기도 이천 설봉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터득한 작은 깨침은 도자기가 융합의 예술품이라는 사실입니다. 흙과 물의 적절한 배합으로 모양을 갖추고 불의 온도차에 따라 토기와 도기와 자기가 만들어집니다. 물론 불의 온도는 바람에 의해 알맞게 조절되겠지요. 이처럼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상생하는 융합에 의해 아름다운 예술품이 탄생합니다.
마찬가지로 역사문화유산 또한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상황에 맞게 펼쳐놓은 종합예술입니다. 우리의 역사인문기행 역시 길동무들이 주인공이 되어 그 시대 그 공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서울학교 제5기는 시대에 맞는 트렌드를 담아낼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여 다시 여러 길동무들을 찾아가려 합니다.
경자년庚子年 우수雨水
설봉산雪峰山 관고재官庫齋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