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특별히 갈 곳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어서 건들건들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사실 심심할 틈이 별로 없는데, 자세를 약간 바꿔 골목 이쪽 끝에서 반대쪽 끝을 바라본다. (…) 비어 있는 골목에는 수많은 소리가 남아 있다. 나는 그 소리들을 채집하고 기록한다. 그리고 좌판을 깔듯 이야기들을 펼쳐놓는다. 그러니까 여기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이런 이야기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와 그를 지나치는 사람들에 관한.
“쓰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채워져 있더라는 말은 들어본 적 있어도 쓸수록 줄어들다니, 홀린 기분이었다. 홀린 기분은 홀린 기분인데 그게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접힌 문장들이 있다. 문장을 쓰면 쓸수록 문장이 사라지고 단락이 줄어들어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원고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접힌 파일 안에 더 많은 것이 숨어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