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년(1991년) 섣달에 썼던 자서(自序)를 무술년(2018) 정초에 또 쓴다. 햇수로 스물여섯 해 만이다. 서툴고 미숙하게 세상에 분양했던 시들을 이산가족 상봉하듯 다시 만난 느낌이다. 험난한 세파에 휘둘리다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녀석도 있고, 연줄을 끊고 제 갈 길 찾아 영원히 떠나버린 경우도 있다.
늘 곁에서 벗이 되어줄 것 같았던 소소한 것들이 내 삶의 리듬이었다고 호기롭게 얘기했던 첫 시집을 들추고 있노라니 많은 것이 변하고 바뀌었다. 시의 소재가 되어주었던 어린 날의 정서가 사라져갔다. 초가집이 사라진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올렛길에 심어졌던 먹구슬나무는 베어졌다. 초남동산은 깎이고 생이오름은 빌딩에 가리워져 보이질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멸종되어가는 풍경들이다. 어디 풍경뿐이랴. 할머니도, 궁핍한 시대의 목숨붙이들도 이승을 떴다. 더욱이 발문을 써 주셨던 오성찬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고향 상실의 시대에 그나마 글을 통하여 삶의 리듬을 파괴하는 것들에 저항하겠다던 당시의 열정이 한 푼어치라도 남아 있다면 다행이다.
이번 《생말타기》가 새 생명을 얻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reborn)까지는 작당(?)한 산파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분들에게 각별히 고마움을 전한다.
- 2018. 1. - 2018년 自序
글을 쓴다는 작업을 진절머리가 나도록 저주해 본 일이 있다. 한밤중에 깨어나 몽유병 환자처럼 끄적거려보다가 자신을 되돌아보곤 소스라치게 놀라던 일, 펜을 잡은 손이 잘린다 해도 그 기능을 발로, 입으로라도 해내고야 말 것이라는 생각에 아예 의식까지 마비되어 버렸으면 할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이 달라졌다는 건 아니다. 시시각각으로 덤벼오는 나태와 안일의 늪 속을 허우적거리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허울 좋게 덤벼들던 객기마저 시들어 버린 건 아닐까 하고 덜컥 겁날 때가 많다.
이번에 작품들을 엮어보면서도 생각 키우는 건 글 쓰는 사람이나 세계에 대하여 실컷 보내기만 했던 냉소적인 반응을 이제는 내가 감당해야 할 차례임을 느껴본다.
대학 시절부터 글쓰기 작업이 나의 프리즘을 통과하는 동안 상당히 굴절된 모습으로 반영되지나 않았을까 우려해 본다. 들녘의 풀 한 포기가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나만의 잣대로 금을 긋고 나만의 저울로 무게를 달아 쉽게 쏟아낸 언어 나부랭이들.
그런 일련의 행위들을 단순히 자학하는 차원에서 머물러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이 기회를 빌미로 얼버무린다.
이 땅의 자양분을 야금야금 갉아 먹으며 자라온 나로서는 이 땅과의 뜨거운 밀착을 통한 사랑이 또한 내게 부여된 소명이다. 그러기에 주접스러워 하는 토속어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삶의 리듬을 파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온몸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저변에 깔려 있다.
어쨌거나 너절한 글들을 추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후배 녀석의 지겨운 앙탈이 밉지 않다.
- 신미년 섣달에 - 1992년 自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