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간의 조력이 없었다면
이 한 권의 시집을 묶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
모두 조력의 근원이 되어 버렸다.
그것들을 차근차근 묻고
조곤조곤 들었다.
그리고 무수한 질문 끝, 대답을 기록한
계보학을 묶는다.
한 권의 어둠과,
으르렁거리는 별들과
날개를 수리한 흔적일 수도 있다.
멀리 날려고 하지 않았고, 않을 것이다.
비 내리는 내 언저리를 사랑한다.
첫 시집이라는 이유로
오래 가두어 두었던 그늘에게
미안하다.
2016 10월 31일 오후 6시
새가 입을 열었다 닫는 사이에
놓친
이삭의 시를 줍겠다고 나섰다
아직 들판은 자기 일 끝나지 않았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을 염두에 둔 사이
씨앗들은 월동으로 이동이 한창이고
곳간들이 먼지의 틈마저
비워내려 할 때
나는,
줄곧 사용하던 날씨를 버리고
다른 날씨를 산다
어느 계절에 소속된 날씨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한동안 강원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돌아다닌 곳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지명들이 아니라 시詩의 행간들이었다
삼거리쯤에서 고민하며
구불구불한 물길을 따라 달렸던 쇠락한 탄광촌
창문이 깨지고 간판이 낡은
폐업한 다방
모두 한때 흥청거렸던 곳들이었지만
지금은 제 거칠었던 호흡을 되삼키며
산비탈, 허물어지는 사택들처럼 적요해지고 있었다
그런 하루하루에 제목을 붙였다
그 편 편들이 시가 될지 안 될지는
독자들께 맡긴다
2019.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