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를 써 내려가는 것처럼 때로는 내려가는 것이 올라가는 것이어서 무한 공간에 점 하나로 앉아 있으면 다락방에서 찾아낸 어릴 적 나무 팽이 오색 원으로 돌아가다 경계를 섞으며 멈추려 하는 오래된 꿈 하나 보이는 것이다
구름을 뚫고 올라가 만나는 구름과 멀리서 오고 있는 가슴 뛰는 별 마중하고 사다리 칸 하나마다 채워 넣은 바람의 통로엔 나와 함께 악다구니로 타올랐던 말의 재들이 우주로 불려가는 게 보이는 것이다
옆 줄로 건너가 지나온 길을 보듯 헐떡이며 올라와 쪼그려 앉은 내가, 다시 말을 붙잡고 가야 할 길도 보이는 것이다
2020년 11월 30일
뒷문을 열고 곰팡이 핀 바람의 시간을 꺼내 옵니다
뒷문을 열고 어미 닭이 놓쳐 버린 지네 숨어들어 간 벽의 틈을 만납니다
뒷문을 열고 앞마당에선 자라지 못한 이끼의 바위들을 만납니다
뒷문을 열고 달에 올라탄 기러기들의 행렬을 만납니다
뒷문을 열고 풀숲에 떨어진 알밤을 줍습니다
뒷문을 열고 뒷문이 닫혀 있을 때만 꿈꾸는 반란을 만납니다
평소에는 열려 있지 않은 뒤란으로 가는 문을 열고 오래 장독에 담겨 발효되었을 된장 같은 시간을 퍼 담았습니다
2024년 가을
유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