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지 않은 말을 타고 처음 황야로 떠나는 풋내기 카우보이 같은 마음입니다. 새로 산 셔츠와 청바지는 살갗을 슬리게 하고 광택이 나는 부츠는 너무 새것이어서 촌스럽기만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을 소몰이꾼에 비유하는 것이 좀 어색합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제가 몰고 가야 할 소가 천 마리나 더 되는 것 같습니다. 옷과 모자, 부츠가 낡고 닳을 때까지 먼지를 뒤집어 쓸 생각입니다. 그 때쯤이면 어느 서부 영화의 끝 장면처럼 말을 타고 지는 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때 세일러 문이라는 만화영화가 아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적이 있었다.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악당을 만날 때마다 무지갯빛이 나는 천사의 봉을 들이대며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외치는데 그 장면에서 아이들은 박수를 쳐댔다.
어느 시절엔가 나도 소리없는 총 하나를 가지고 싶었다. 이 세상에 그런 총은 없었고 대신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튼튼한 턱을 가지게 되었따.
돌이켜 보면 그 때 그 길고 지루했던 터널을 아무 탈 없이 지나왔다는 것이 내게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작업이 끝난 뒤에도 나는 증후군에 시달렸다. ... 길을 가다 갈림길 앞에 서게 되면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라든가 발을 접질리고 기우뚱 넘어질 뻔하면 '가끔은 삶의 중심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옵니다'라는 식의 문장을 떠올린다. 괜히 낯간지러워 쓰지 않던 '삶'이란 말을 서슴없이 쓰게 된 것도 변화라면 변화이다. 삶이란 사람들의 준말일 것이다.
수상소감
먼 이역땅에서 수상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른 아침의 전화에 불안해하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어서 뜻밖의 전화벨 소리에 시간부터 확인하고 보았다. 아침 여섯 시 무렵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이렇게 이른 시간에 수상 소식을 듣게 된 사람으로는 처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곳이 여섯 시이니 서울은 오후 한 시쯤 되었겠다. 수상 소식은 그렇게 시공간을 초월해 어느 날 우리집 앞에 떨어진 닥터 후의 전화박스만큼이나 얼떨떨했다.
그곳에서도 새벽 네 시에 깨어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시차와 빡빡한 일정으로 몸은 피곤했지만 의외로 머릿속은 명징했다. 하루, 이틀 글을 쓰는 습관에서 벗어나면 몸은 어느새 편안함에 길들여져 다시 그 앞에 앉기까지 쉽지 않다는 것을 수차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 끝내지 못한 원고를 붙들고 앉아 문장 하나하나를 뽑아내면서 이곳에까지 와서 자신을 재우쳐야만 하는 현실이 끔찍하기만 하던 차였다.
(…) 앞으로도 수많은 날들 나는 새벽 네 시에 깨어 노트북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편안함을 찾아가려는 몸을 재우쳐 나는 자꾸자꾸 광야로 내 몸을 몰아부칠 것이다. 나는 홀로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처럼 천천히 갈 것이다. 나는 수많은 시간 묵묵히 한 길을 가고 있는 선후배와 동료들을 알고 있다. 그것을 알기에 그분들에게 송구한 마음을 다해 기쁘고 기쁘게 이 상을 받는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목제 난간 곳곳에 ‘추락 주의’라고 씌어진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다리를 다 건넜을 때쯤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났다. 수문 아래로 흘러가는 물, 단순한 시멘트 구조물과 물의 낙차가 교묘히 만들어낸 무늬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오길 정말 잘했다. 오래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아직 설렐 일이 많을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설렜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도 될 거라는, 지금까지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을 쓰는 동안 봄이 왔고 여름, 가을이 지났고 겨울이 왔다. 그동안 계절을 잊고 지냈다. 덥다 싶으니 여름이었고 추워 겨울코트를 꺼내 입으니 두번째 창작집이 나오게 되었다. 저녁 밥상을 맛있게 차리기 위해 요리책을 뒤적였던 일이 아주 오래 전 기억 같다. 김치를 담그는 건 엄두도 못냈고 시금치나 깻잎을 다듬어 무친 게 손꼽을 정도다. 서둘다보니 나물에서 흙이 씹힌 적도 있었다. 소설들 속에 혹시 흙이 섞여 있으면 어쩌나, 지금 심정이 그렇다.
첫창작집 때보다 조금 능청스러워졌다. 그것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성격 때문에 어머니한테서 꾸중도 많이 들었지만 소설을 쓸 때만은 명확해지려고 애를 썼다. 소설 한 편이 100개들이 귤상자라고 한다면 난 그 속에 99개도 아니고 101개도 아닌 딱 100개의 귤을 채우고 싶었다.
2009년 1월 19일부터 그해 연말까지 한국일보 ‘길 위의 이야기’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는다. 새해 보름 남짓이 빠지긴 했지만 거의 한 해 동안 일기 쓰듯 글을 썼다. 걸핏하면 빼먹고 꾸며 쓰고 한번에 몰아 쓰느라 동생의 일기장에서 날씨를 베끼던 때가 떠올랐다. 그 시절을 반성이라도 하듯 정해진 650자를 맞추려 노력했다. 그렇지 않은 해가 없었겠지만 작년 한 해도 다사다난했다. 많은 이들과 함께한 순간들을 두고두고 잊지 않을 거라던 그 마음이 그새 아스라해졌다는 것에 놀란다. 바꿔 말하자면 이 짧은 글들이 다시는 못 올 2009년에 바치는 송사쯤으로 읽히면 좋겠다. 2009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떠난 이들도 다시 오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슬프다. 제목을 ‘왈왈’로 정하고 보니 지난 한 해 정말 왈왈(曰曰)댔다는 느낌이다.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고 쉬고 작은 목소리나마 제 목소리를 내려 했다. 지면을 내준 한국일보에, 언제든 나만의 2009년을 꺼내볼 수 있도록 책으로 묶어준 아우라에 감사드린다. 개 짖는 소리도 독경이라고 했던가, 어둠 속 어디선가 짖는 작은 개 소리에도 귀기울이는 날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2009년은 총총총 사라졌지만 아직도 내겐 두 가지 본능이 남아 있다. 650자 본능과 짖으려는 본능이다. “왈왈!”
다른 작가들은 어땠는지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 나는 책으로 묶인 내 소설들에 대해 절교를 선언하고 돌아서는 사람처럼 매정하리만치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체념이 반, 당장 써야 할 소설들에 대한 조급함이 반이었다. 십구년 만에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에 실린 소설들을 찬찬히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건 시간의 힘이다. 그 시간을 관통해온 나는 오래전 내 소설이 낡았다고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 소설들에 대해 내가 쓴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어 안도감을 느낀다. 서른살 초반의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안간힘을 다해 글로 옮겼을 것이다. 순전히 독자의 입장이 되니 착오는 물론 아쉬움들이 속속 눈에 띈다. 지금은 쓰기 꺼려지는 단어와 상황들로 그 시절을 돌이켜볼 수도 있었다. 변화에 안도했고 여전히 야만의 상태로 머물러 요지부동인 것들에 절망스러웠다.
단편 「개망초」는 소설집 맨 끝에 실려 있다. 1998년 무크지 형식의 단행본에 첫 발표를 했으니 소설집에서 가장 오래된 소설이다. 강을 떠내려가는 소녀의 독백을 따라 읽는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도 신문에서 오린 그 기사는 낡아 있었다. 소녀에게서는 신원을 확인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등신대 모양으로 펼쳐놓은 재킷과 티셔츠, 그리고 반바지와 운동화. 결국 경찰은 소녀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을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신문에서 그 사진을 오려 노트에 붙여놓고 소녀의 신원이 밝혀졌다는 후속 기사를 기다리며 틈틈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기다리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어느날 문득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마음, 죽은 소녀와 그 소녀로 향한 마음, 그 마음만큼은 내 것이었다. 그로부터 이십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모든 것을 낡게 하고 부서뜨리지만, 애욕도 집착도 무르게 하지만, 무엇보다 되돌릴 수 없다는 진실로 매순간 절망하게 하지만, 그때 그 마음만큼은, 모든 것이 낡고 공허한 목소리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름을 부르듯 소녀에게로 향했던 그 마음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혹시라도 오래전 이 책을 읽은 독자가 다시 이 책을 펼쳐보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그동안 잘 지내셨냐는 안부를 전한다.
2021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