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참 고운 날이다. 한 그루의 대추나무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이 나무를 처음 본 것은 오래전 겨울이었다. 잎들이 다 저버린 나뭇가지가 불꽃처럼 하늘을 향해 있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나무를 구별할 줄 모른다. 잎이 돋아 반짝반짝 윤기가 돌아도 잔별 같은 꽃이 피어나도 그 나무가 무엇인지 몰랐다. 세월이 스미어 나무에 작고 푸른 열매가 달렸을 때 비로소 대추나무라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에게 물었다면 더 빨리 알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세월이 흐르면 절로 알게 된다는 것을 안 까닭이었다. 하지만 수필은 그러지 못한 모양이다. 등단하고 꽤 많은 세월이 흘러 수필집을 내놓지만, 여전히 덜 익은 맛이다.
한 권의 책으로 묶기 위해 글을 모으고 읽어가다가 글도 세월과 함께 낡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글이라는 것이 생물 같아서 매만지면 매만질수록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지만, 첫 수필집이라 되도록 손을 대지 않았다. 사유의 깊이가 깊지 못하고, 표현이 다소 거칠어도 열정 가득했던 풋풋한 흔적을 남겨 두고 싶어서이다. 그러다보니 아들이 소재가 된 「모자이크」와 「줄자」는 글 쓴 연도가 많이 차이 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도를 표시해두었다.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더 내놓을지 모르겠지만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것으로 믿으며 나를 응원한다.
1부는 소외와 단절의 이야기이다. 문명의 발달, 인간의 이기심이나 욕심, 삶의 서투름에서 오는 삐걱거림을 담았다. 그 삐걱거림을 살살 달래며 사는 것이 삶의 균형 잡기라 생각한다.
2부는 가족 이야기이다. 사랑하기에 상처받고 쓰다듬으며 천생 함께 가야 하는 가족이라는 연분만큼 특별한 것도 없으리라.
3부는 한국어 교사로 일하면서 바라본 다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스케치했다. 내 삶의 또 다른 인연이다.
4부는 가만히 들여다본 내 삶의 뜨락이다. 그리운 뜰, 아팠던 뜰, 사유의 뜰이 괭이밥처럼 노랗게 고개를 내민다.
5부는 내 이웃의 이야기들이다. 누구나 목련이 있는 풍경처럼 우아하게 살고 싶겠지만 녹록치 않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인연들로 채워가는 그림이라 생각을 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이 만나서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부족한 부분은 채워지고 모난 부분은 깎였다. 때때로 그것들은 내 수필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삶의 교훈으로 남기도 했다. 그래서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아픈 인연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많은 인연 중에서도 햇살 같은 인연이 있다. 내 삶의 공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늘 빛을 내는 문우들과의 인연이다. 적지 않은 삶을 살았음에도 낯가림이 많은 편이라 먼저 친근하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수필집 내는데 많은 관심과 격려를 해주신 선후배 문우님들이 있어 행복했다.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못하는 성격이라 소소한 개인적인 일로 많은 사람들과 관계가 조금 소원해진 것 같다.이 기회를 빌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많은 사람을 사귀기보다는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련다.
해마다 대추알이 붉어지고 단맛이 들면 꼭 맛보리라 생각하지만, 수년째 대추의 단맛을 보지 못했다. 아파트 화단에 있는 나무라 주인이 없으리라 생각하는데 해마다 몽땅 따 가버린다. 열매가 없어진 나무를 보면 허탈해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는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더 나를 설레게 하기 때문이다.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는 한 나는 또 삶을 열심히 살아낼 것이다.
2015년 입동 무렵
어쩌다 두 번째 맞이하는 서른 살입니다. 그동안 생일상을 직접 차리기 싫어 외식을 고집했는데 뜬금없이 생일상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생일상을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대접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맛있게 힐 욕심으로 유튜브를 보며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만들고, 오이도 무칩니다. 조리법대로 했는데 입맛에 맞지 않습니다. 유명한 요리사의 비결이라고 다 맛있는 건 아닌가 봅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요. 입에 맞게 양념을 다시 합니다. 미역국에는 들깻가루를 넣어 구수함을 더하고 잡채에는 흑설탕을 넣어 단맛과 향을 입힙니다. 오이무침에는 매실청을 넣으니 한층 맛이 납니다.
한 갑자를 돌고 다시 한 살이 된 지금에야 삶에도 나만의 조리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서른 살은 삶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에 나만의 비법을 더해서 맛깔나게 살 생각입니다. 더 이해하고, 많이 사랑하고, 주위를 돌아보며 느긋하게 살려고 합니다.
두 번째 서른 살을 자축하며 두 번째 책을 엮습니다.
2집을 준비하면서 표지 선정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해와 달의 시간이란 생의 종착지로 가는 길에서 느닷없이 만나게 되는 복병입니다. 뇌가 퇴화하면서 지는 해와 뜨는 달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간, 기억이 흐릿해지는 시간입니다. 잊고 싶은 일은 흐려지더라도 아름다운 추억들은 기억의 의자에서 선하게 날아다니면 좋겠다는 저의 바람이 담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