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논하는 자로서 나의 중심 화두는 ‘리얼리즘의 성취’ 혹은 ‘현실성의 구현’의 문제였다. 다시 말해 얼마나 실감나게 현실인식이 구체화되어 시적 성취에 이르는가가 내 시론의 중심 과제였다. 하지만 어찌 이것이 시를 논하는 자의 문제이기만 했겠는가. 시를 쓰는 자로서의 나를 뒤돌아볼 때도 이것은 주요한 과제였다.
시인마다 편차가 많겠으나 아무래도 나는 한국 현대시사를 강하게 의식하면서 시를 써온 경우에 해당된다. 얼마나 강하게 의식하며 시를 썼느냐와 상관없이 한국어로 의미 있는 성취를 보였을 때 누구나 휩쓸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한국 현대시문학사의 융융한 흐름을 나는 강하게 느끼며 시를 써왔다. 이제 와서 되돌아보자면 좀더 자유로울 필요도 있었겠다 생각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절이 되었다.
시인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가치를 추구하며 시를 써왔고 쓰고 있다. 그런데 그 가치 추구가 문학사의 흐름에 합류할 때 서정성, 현대성, 현실성의 문제로 수렴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쉽게 말해서 얼마나 정서적으로 울림이 있나, 얼마나 발상과 형태가 새로운가, 얼마나 현실인식이 유연하며 실감나나의 과제들을 시인들은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대응과 천착이 시인으로서의 개성의 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를 읽는 일은 샘터에서 물을 마시는 것과 흡사한 데가 있다. 세상길을 걷다보면 증폭되게 마련인 정신적 갈증을 풀고 각자 나름대로의 감회와 상념에 잠기게 한다. 등산길의 샘물이 마르면 안 되듯이 좋은 시는 찾아 읽는 독자의 마음을 흠뻑 적실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책은 마르지 않고 솟는 샘이 도리 만한 시를 가려뽑고 그 샘터에서 물 떠먹고 떠오른 상념을 적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