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는 소녀 시절을 정의하는 ‘보편 경험’에 대해 제기하는 내 의문에 대해, 소녀들의 삶에 가해지는 가부장제 각본이야말로 우리의 공통 경험이라는 예리한 답변을 내놓는다. 한 사람의 삶의 이력에 담긴 특별한 차이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서도 타인과 연결되는 익숙한 경험을 구별해내는 피보스의 재능은 이 책에서도 돋보인다.
소녀 시절은 “우리가 인정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욱 어두운 시절이다”. 모든 동물이 생존하기 위해 강한 힘과 큰 덩치를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달리, 오로지 소녀들만이 더 작고 여린 신체를 선망하고, 자신의 힘을 미워한다. 타인에 의해 쓰인 이야기들이 소녀들을 ‘잡년’으로 만들고, 소녀들의 신체와 여성들의 방을 함부로 드나들기 때문에, 스토킹을 로맨틱한 구애 행위로 보여주는 영화와 드라마를 소녀 시절이 끝날 때까지 줄곧 재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바깥에서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소녀들은 가부장제 규율들에 자신도 모르게 순응하고, 때로는 그것에 가담하거나 협조한다. ‘노 민즈 노No means No’가 허용되는 순간에조차 양가적이고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가해자의 기분을 맞추느라 애써 웃고 변명을 덧붙인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어둠이다. 소녀들이 스스로를 지우고, 부정하고, 왜곡하고, 내가 아닌 타인의 눈으로 인지한 몸을 미워하고, 힘껏 깎아내며 보내는 시간이다.
피보스의 여러 책들 중 이 책을 가장 먼저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 번역가로서 친구들에게 ‘꼭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선보이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 이전에 나만의 고유한 어둠을 지닌 한 여성으로서, 홀로 어둠을 헤매며 곤혹스러워하던 소녀 시절의 내가 결국은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때늦은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독자들에게 이 책이 적시에 도착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여성적 삶의 그 어떤 시기에 만나더라도 의미 있는 책이리라 믿으며 옮겼다.
갈라파고스 편집부에서 의논해 정해주신 한국어판 제목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는 이 책이 실린 글 중 하나인 「테스모포리아」에서 가져온 것이다. 테스모포리아는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를 축복하는 여성들만의 비밀스런 축제다. 이 글에서 소환하는 것은 페르세포네가 어머니 데메테르와 동등한 힘을 지닌, 그 자체로 강력한 여신이던 더 오래된 신화의 각본이다. 대지에 찬란한 황금빛을 쏟아붓는 어머니를 힘껏 밀쳐내고 딸은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뛰어든다. 그곳에 다녀온 뒤에야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므로.
어둠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나아가 작품으로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렇기에 소녀 시절은 과거형으로 쓰인다. 어둠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우리가 공허하게 동의한 각본을 발견할 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법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또, 그 이야기를 다른 소녀들에게 횃불처럼 전해줄 수 있을 테니까. 불을 밝혀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우리의 힘을 빼앗고 억누른 것들을 낱낱이 드러내는 일은 아마 우리가 평생에 걸쳐 할 작업이자, 가장 뛰어난 작품이 될 것이다.
논바이너리 저자가 아이를 만들고 나아가 아이가 자신을 만들도록 내어 주는 과정이 법원 판결문, 짤막한 진술, 기억의 파편, 사진 들로 제시된다. 감정과 경험을 이어 붙인 조각보의 모양으로만 그 풍부함을 보여 줄 수 있는 삶도 있기 때문이다. 『논바이너리 마더』는 내가 그해에 읽은 이야기 중 가장 추상적이고도 진실한, 무엇보다도 유연한 유머와 기쁨으로 넘치는 아름다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