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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가정/건강/요리/교육

이름:조후종

최근작
2015년 1월 <한국음식문화>

이남규, 한국 유리화의 선구자

나의 남편 이남규李南奎를 회고하며 이 책을 썼습니다. 나는 미술 전공자도 아니며, 미술과 관련 있는 일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화업畵業을 평생의 소명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이남규를 가장 가까이서 보아 온 사람으로서, 그의 일생을 글로 남기기로 생각하고 생전에 남긴 자료들과 기억들을 더듬어 이 책을 썼습니다. 남편 이남규는 1991년 4월 28일에 금호미술관에서의 회갑기념 초대전을 사흘 앞두고 쓰러졌습니다. 평소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그리던 서정추상화 외에도 나뭇결에 혼을 불어넣듯 새긴 조각작품까지,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러 장르의 작품 제작에 몰두하더니 결국 ‘과로’였습니다. 인간의 혼은 한계가 없으나 육신은 한계 상황을 넘어 힘에 부쳤던가 봅니다. 이미 준비가 끝난 금호미술관의 「이남규 회갑기념 초대전」은, 작가를 병원 침대에 누인 채 미술관 측과 아내인 제가 주관자가 되어 조용히, 그러나 전에 없던 성황을 이루며 마쳤습니다. 의식 없이 누워만 있어도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을까요. 그 후 두 해 동안 ‘단 한순간만이라도 눈을 떠 의식을 회복하였으면’ 하고 날마다 간곡히 바라던 가족의 염원을 뒤로 하고 그는 반만 살아 있다가 1993년 3월 13일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월이 가면 잊혀지려니 하고 살아왔지만, 내 마음엔 언제나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중압감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잊혀지기는커녕 나를 힘들게 하는 마음의 빚을 갚을 길이 무엇인지, 요즘에 와서는 점점 더 분명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 말도 못 한 채 그를 떠나보낸 견디기 힘든 아픔에서 시작하여, 내게 새로운 힘으로 일으켜 세우라는 피할 수 없는 명령과도 같은 또 다른 과제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 나와 미술교사였던 청년 이남규는 문화와 예술을 논하며 목마른 젊은 혼을 적시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한 성당의 문화교실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수요문화모임’을 이끌어가던 중이었고, 나는 회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대전사범학교와 공주사범대학 국문과를 나온 이남규는 그 어렵던 한국전쟁 중에 다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들어갔으니, 그러한 문화 토론 모임을 이끄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던 이남규에게 그림은 숙명이었고, 나의 인생 또한 그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그림의 세계에 조금씩 잠겨들게 되었습니다. 그림만 그리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은 “이제 어쩔 수 없이 글재주 없는 당신에게 나의 작품과 예술세계의 기록을 맡길 수밖에 없지 않겠소?”라며 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의 주변에서 늘 그의 우스갯소리로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성당에서 신부님을 통해 만났고, 오십여 곳 성당에 그의 유리화 작품 수백여 점이 빛으로 공간을 가르고 있으니, 이남규의 작품을 기록할 때 그의 신앙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흔히들 현대문화는 종교중립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현대 예술가를 말할 때 예술가 자신의 종교는 사생활의 일부이기에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마는, 이남규의 경우 누군가 말했듯이 ‘그의 신앙이 예술이요, 교육이며 삶’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창 시절, 장욱진張旭鎭 선생의 그림세계에 빠졌던 이남규의 예술이 서정추상화로 자리를 잡아 평생 추구하게 된 것은 프랑스 파리에서의 공부를 통한 결실이었습니다. 아울러 유럽 유학시절에 만난 빌거M. Bilger 여사와 이사벨 루오I. Rouault, 그리고 마네시에A. Manessier 등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만, 이남규는 “더 이상 파리에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다. 어디에서 그리든지 ‘자기’만 있으면 된다”면서 귀국한 후, 공주사범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정기적으로 개인전을 열어 ‘자기다운’ 작품을 추구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작품들이 그가 떠난 빈방에 빼곡히 들어차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언젠가 비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그림들을 해방시켜, 작품이 말하는 신적神的인 자유를 많은 이들이 시각언어로 들을 수 있게 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하루빨리 그의 기념관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나의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이 가까워질 날을 기다립니다. 이 글을 쓰면서, 짧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놓지 않고 열심히 살고 떠난 남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2003년에 「이남규 작고 10주기 추모전」을 할 때 전시회를 주관한 가나아트센터 최열 선생이 이남규가 살아온 이야기를 기록해 보라며 『회상·나의 스승 김종영』과 『하인두의 삶과 예술』 등 몇 권의 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지내던 박영배朴永培 목사가 이남규를 생각하며 감명 깊게 읽었다는 『남편의 숙제夫の宿題』(遠藤順子 著)라는 책을 주었습니다. 책을 받아 들고 몇 차례 정독하면서 나도 써 보리라 시도했지만, 어쭙잖은 이학도理學徒로 글재주도 없는 데다가, 그의 일생을 총체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몇 꼭지 써 나가다 멈추고 다시 꺼내 들고 하기를 몇 해 하다가 아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2009년에 열화당 이기웅李起雄 사장이 우연히 이남규의 그림을 보았다면서 관심을 가지고 책을 기획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딸 윤주가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내 원고를 열화당에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순서도 없고 준비도 되지 않은 이 졸고를 가지고 출판이 진행되었습니다. 글을 다듬어 가면서 이남규를 아끼고 사랑해 준 은사님들, 신부님들,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이 많았음을 알았습니다. 이 책이 생명력을 갖게 되고 더욱 빛날 수 있게 해준 그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실을 기록하려고 노력했지만, 주제넘은 이야기들을 쓰지는 않았나 염려됩니다. 혹여 잘못된 기록이나 표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족하거나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보이면 알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바로잡아 고치겠습니다. 특히 남편이 ‘앙가주망’ 활동을 좋아했는데, 자료도 못 찾고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글로 남기지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 이 글이 완성되도록 도와 준 장명숙 선생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열화당 이기웅 사장님과 안은영 사모님, 꼼꼼히 원고를 보아 준 백태남 편집위원님, 그리고 공미경 부장과 조윤형 팀장, 이수정 팀장을 비롯한 열화당 식구들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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