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매일 바쁜 일상의 연장선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더군다나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탓에 활동적이지 못하고 일터에서 집, 집에서 일터로만 오갔다. 그러던 어느 날 차(tea)모임에서 걷자는 제의에 동의하여 일본 시코쿠 순례길을 걸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온종일 걷을 수 있는 것에 스스로 놀라고, 걷는 것이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일상 속에서 모임의 구성원들이 모이면 걷기로 했다.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및 무등산 둘레길 등 이곳저곳을 걸었다. 하지만, 삼남길은 일상에서 나를 과거 저편으로 떠나는 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삼남길 이야기》에서 삼남길은 조선시대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지역을 총칭하는 삼남대로로 해남-강진-광주-익산-천안-서울을 잇는 1,000리 길을 말한다. 즉, 해남의 땅끝에서 시작하여 서울의 구파발까지 도보 여행자들이 안전하게 자연과 문화를 느끼며 걸을 수 있도록 조성된 21세기형 문화 탐방로이다. 길의 방향 표시는 부메랑이 세 개 겹친 모양으로 서울 방향은 초록색으로, 해남 방향은 주홍색으로 안내하고 있다. 2016년 후반부터는 사람 형상 그림이 머리 방향으로 걸어가게 표시되어 있다. 간혹 표시가 보이지 않으면 걷던 길을 되돌아가 확인하면 된다. 걷다가 삼남길 방향 표시와 더불어 펄럭이는 리본이 나오면 반갑고 든든하다. 그대로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수수께끼를 풀 듯 리본을 찾는 재미 또한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삼남길 전체코스는 총 47개 코스로 총 600km가 된다. 전라남도는 14개 코스(1-14코스), 전라북도 8코스(15-22코스), 충청남도 10코스(23-32코스), 경기도 12코스(33-44코스), 그리고 서울 5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배꽃길을 처음으로 걸었다. 그날이 바로 세월호 사건이 있던 날로 잊히지 않는다. 젊은 청춘들이 진도바닷길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슬픈 날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던 세월호가 바다 밑에서 뭍으로 끌어올려졌다. 2017년, 3년만이다. 눈물이 고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음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도 삼남길을 끝까지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년을 하고 나서도 삼남길 걷기를 마무리하고자 하는 뜻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지만 여전히 바쁜 일상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2019년 3월 11일 홍은동 사거리에서 구파발역까지 서울의 마지막 구간을 걸었으니 5년이 걸린 셈이다. 처음에는 함께 걸었고 때로는 둘, 셋이서, 그리고 홀로 걸을 수 있었던 삼남길. 힐링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동안 한 구간씩 걸으면서 성취감과 자신감이 늘어났으며, 지금 이 시간 한 가지 정한 일을 마무리했다는 벅찬 감정이 스며든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길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서해랑길을 걷는 날은 선물 같은 하루가 주어졌다
서해랑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드넓은 갯벌과 구릉 따라 붉게 드러난 건강한 황톳길을, 그리고 황홀한 일몰을 감상하게 된다. 전남의 농업문화와 종교와 목포근대문화의 거리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인류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때로는 자연이 선사하는 느린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감성을 채우는 풍경을 따라 마음까지 넉넉해지는 여정이 되기도 하고. 물론 많은 볼거리, 즐길거리와 먹을거리가 풍성한 도보여행이 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한반도 최남단 서쪽 바닷길 따라 걷는 서해랑길에서는 울창한 갈대숲과 화려한 새들의 비상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진한 민족의 넋과 얼이 서린 섬들이 다리로 연결되듯 삶이 생생하게 이어지는 공간임을 느끼게 한다. 특정한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장소 안의 사람과 관련되어 있거나, 혹은 장소 그 자체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재미지다.
서해랑길은 허투루 지나면 안 된다. 자연과 삶이 어우러진 예술 작품의 일부가 되는 보물찾기 여정이 시작되는 길이다. 서두루지 않고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야 한다. 관심 없이 무작정 그냥 걷기만 하면 보통의 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다소 무미건조한 길이다. 보물은 인근에 숨겨두었다. 생물학적 흔적을, 정신적인 흔적을, 문화적인 흔적을, 단서가 되는 구체적인 흔적을 찾아 여행하는 시간이다. 이는 곧 역사와 미래로의 여행이다. 손이 닿은 곳이면 모든 원전에서 지식을 끌어 모아 담아볼 생각이다.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