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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이름:정효구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8년

최근작
2024년 1월 <영성 수행으로서의 시읽기와 시쓰기>

[큰글자책] 다르마의 축복

이 책은, 지난 늦은 봄부터 저의 삶과 마음 안에 존재하는 ‘다르마의 풍경’을 찾아내며 스스로 숨 쉴 장소를 만들었던 흔적입니다. 공부의 진도는 쉽게 나아가지 않고, 사바세계에서 인간 종으로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난제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 종에게도 ‘다르마의 소식’이 당도해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자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이 다르마의 소식에 기대어 숨 쉰 풍경 속에서 여러분들도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유의 화평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님의 말씀

지난해 말,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을 출간한 이후,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 하나는 ‘선시 읽기’를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시 속의 대우주와 대자연’을 연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선시 읽기’를 준비하던 중, 저는 그만 저도 모르게 시를 쓰는 데로 나아가게 되어 『신 월인천강지곡』이라는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우리 시 속의 대우주와 대자연’을 연구하려던 중에도 같은 일이 발생하여 그만 저는 다시 시를 쓰게 되었고 이번 시집 『님의 말씀』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신 월인천강지곡』의 자서란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시인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가 찾아오면 시를 쓸 수도 있다는 마음입니다. ‘모두가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은’(이성복) 이 시대, ‘치료를 기다리는 무병(無病)’(이상)이 미만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저는 ‘신성성’ ‘우주성’ ‘자연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이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갖고 지냈습니다. 달리 말하면 ‘대진리’ ‘대우주’ ‘대자연’의 존재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체득하고 증득하며 살아야만 이 시대의 더 깊어지는 병세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지냈던 것입니다.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을 출간한 것도, 『신 월인천강지곡』을 출간한 것도, 그리고 이번 시집 『님의 말씀』을 출간하는 것도 다 위와 같은 마음이 빚어낸 것입니다. 소아중심주의, 개인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욕망중심주의 속에서 과잉나르시시즘과 과잉분별주의, 과잉욕망주의와 과잉지식중심주의, 그리고 과잉인간우월주의와 과잉인위주의가 지배하는 현재의 삶으로는 인류가 참다운 건강성 속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도 문제이지만 그 이후가 언제나 문제입니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보든,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보든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를 심각하게 걱정하며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대학의 시론 강의실에서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나무와 꽃들을 몰라서 함께 시를 읽을 수 없는 젊은 세대들을 보며 복잡한 심정에 빠져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을 동경하고 땅을 그리워하며, 산을 알고 싶고 바다에 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심층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나무와 꽃들을 사랑하고, 새들과 나비들을 만나서 교감하며 살고 싶은 속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 위에서 저는 ‘대우주와 대자연’을 세상에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대우주와 대자연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나’의 말과 ‘인간’의 말만을 쏟아냈습니다. 침묵하며 귀를 열어 ‘대우주와 대자연’의 말씀을 들을 때가 되었습니다. 대우주와 대자연은 인간들의 부모이자 선배이고, 선생이자 동료이며, 법사이자 도반입니다. 부족한 면이 적지 않지만, 제 시를 읽으면서 대우주와 대자연에 새로이 눈을 뜨고 그들과 한몸이 되어 좀 더 차원 높은 인생과 인류사를 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소망합니다.

다르마의 축복

이 책은, 지난 늦은 봄부터 저의 삶과 마음 안에 존재하는 ‘다르마의 풍경’을 찾아내며 스스로 숨 쉴 장소를 만들었던 흔적입니다. 공부의 진도는 쉽게 나아가지 않고, 사바세계에서 인간 종으로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난제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 종에게도 ‘다르마의 소식’이 당도해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자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이 다르마의 소식에 기대어 숨 쉰 풍경 속에서 여러분들도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유의 화평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마당 이야기

마당 없이 유년을 보내는 어린아이들에게, 마당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싶다. 맘껏 뛰어놀 장소를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야생의 놀이터인 마당을 되돌려주고 싶다. 마당과 같은 성실함과 튼실함을 배워가야 할 아이들에게, 드넓은 마당의 꿈을 선사하고 싶다. 추상의 교과서 앞에서 젊음의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들에게, 생생한 마당의 육체성과 자연성을 느끼게 하고 싶다. 가상세계의 가벼움과 근시안적 효율성에 사로잡혀 진정 깊이 사는 법을 공부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마당의 깊은 몽상과 농익은 철학성을 만나도록 하고 싶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하늘과 땅과 별과 바람을 보지 못하고 공부하는 수험생들에게, 마당의 우주성과 영성을 느끼게 하고 싶다. ('마당과의 만남을 위하여' 중에서)

바다에 관한 115장의 명상

오랫동안, 나의 마음은 ‘바다’에 가서 머물러 떠날 줄을 몰랐다. 2008년에 출간한 『마당 이야기』의 ‘마당’ 이후 내 영혼이 찬탄과 감동과 사랑과 애틋함을 갖고 만난 것이 ‘바다’이다. 『마당 이야기』에서 나는 ‘마당’을 몽상하고 그 철학성과 영성을 현실 속에 전달하는 데에 마음을 쏟았다. 그 책의 뒷부분에서 나는 바다라는 마당과 마음이라는 마당에 대해 언급하고 기술하면서 상당한 미련을 남긴 채 글을 마쳤다. 이 두 가지 마당은 나에게 미래에 탐구할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한편으로 불교경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경전 공부를 하면서 나는 소위 ‘마음 마당’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러면서 다른 한 편 물질적인 바다를 찾아가며 ‘바다 마당’이라는 세계를 입체적으로 탐구하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그 ‘바다 마당’에 대한 공부가 지금 거친 대로, 부족한 대로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시대, 우리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두 가지 마당은 ‘마음 마당’과 ‘바다 마당’이라고 생각된다. 이 두 가지 마당이 마련되고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협소해지고 부박해지고 얕아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삶의 불균형과 그 불균형에서 오는 불건강함이다. 이 때의 불균형과 불건강함은 개인의 심신은 물론 사회 전반의 삶의 격이 낮은 단계로 하강하는 것이다. 바다는 이 시대의 최고의 화두이다. 육근(六根: 여섯 가지 감각)이라는 몸의 감각을 가진 인간들에게 바다는 일차적으로 육신의 불균형을 치유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 철학성과 정신성, 미학성과 우주성을 읽어내야만 화두로서의 바다의 내적, 시대적 효용성은 기대한 수준으로 상승되거나 최고의 수준으로 격상될 것이다. 미흡한 글이지만, 인연 닿는 분들과 바다를 시대적 화두이자 내적 정신성의 세계로 앞에 놓고 대화하는 시간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시적 언어로 쓴 명상 에세이’의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시적 언어가 주는 특성과 명상의 세계가 주는 특성을 함께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이 어려운 시대 속에서 항로를 잃고 좌충우돌하는 우리들의 삶이 어떻게든 좀 나아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인간 된 자의 품위와 지금까지 가꾸어온 인간 종으로서의 정신세계가 어떻게든 꽃으로 피어나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화두로 내어놓은 ‘바다’는 얼마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인 바다를 거쳐 그것이 영혼의 바다가 될 때까지, 쪽빛 바다를 거쳐 그것이 진리의 바다인 금강의 법해(法海)가 될 때까지 우리의 나날이 바다라는 화두를 품고 밝은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불교시학의 발견과 모색

나는 한동안 인간세상의 인위적인 것을 바꾸면 세상도 삶도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간과 인류를 믿었고, 그들의 이성과 지성을 믿었으며, 인간사와 인류사의 진전에 대한 꿈을 순정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이 얼마나 단견인가를 깨닫게 되는 때가 왔고, 그 깨달음은 아픔과 더불어 새로운 모색의 길로 나를 나서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 나는 아주 단순하지만 간명하게 인간들의 ‘중생심(衆生心)’이 타파되지 않는 한 어떤 삶도 ‘다른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진단 위에서 나는 그 해결을 위하여 어설프지만 진지한 발걸음을 계속 내디디게 되었다. ‘불교시학’에서의 불교는 신앙이나 종교 이전에 하나의 철학이자 사상으로 보더라도 우리가 처한 현실과 시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하는 데 훌륭한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 부족하지만 나의 글과 더불어, 아니 불교 및 불교시학의 내면과 더불어 삶과 시가 밝아지고 맑아지는 시간이 생성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

시학자로서 내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시란 무엇인가’였다. 좀처럼 그 실체가 드러나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이 물음이 계속되는 시간과 노력과 열정에 비례하여 이에 대한 답은 풍성해져갔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체계화시켜 한 권의 책으로 서술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 시학계의 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한, 이른바 서양의 근대시론은 내게도 큰 참고서이자 디딤돌이 되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시학계의 시론 형성에 서양의 근대시론은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 서양 근대시론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의 근현대 시론은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서양의 근대시론과 그 영향 아래 형성된 우리 시학계의 시론들 앞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아쉬움, 낯섦, 결핍감, 소외감 등은 언젠가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다. 그것은 서양 시론 자체의 맥락에서도, 그리고 그것을 이 땅에 수입한 우리 시학계의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서양의 신비평 이론을 바탕으로 석사학위 논문(1983년)을, 그리고 기호학 이론을 원용하여 박사학위 논문(1989년)을 썼다.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으나, 논문을 쓰는 과정은 흥미로웠고, 시 연구가 인상주의 비평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는 한 방법을 만난 듯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가운데서 뭔가 모를 허전함과 소외감을 느끼며 동양의 경전과 만나는 시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용』과 『주역』과 『노자도덕경』은 당시 가난하고 들뜬 나의 마음을 좋은 탕약처럼 가라앉혀주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00년대 초반이 되면서, 나는 서양의 근대시론과 다른 새로운 시론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써야만 할 것 같은 내적 소리와 충동을 자주 듣고 느꼈다. 무위(無爲)의 시론, 허(虛)의 시론, 도(道)의 시론, 자연(自然)의 시론, 중(中)과 화(和)의 시론 등과 같은 가제를 붙여보면서 그 방향과 내용을 구상해보곤 하였다. 그러나 글을 써보려고 하면 여전히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였다. 공부가 덜 된 까닭이었다. 동양 경전과 사상에 마음이 가 있던 내게 2006년도는 특기할 만한 해였다. 나는 동양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음양오행론을 한 전문 연구자이자 임상학자로부터 배우게 되었고, 그간 인연이 닿지 않아 가까이 가지 못했던 불교와 만나는 행운도 누리게 되었다. 이 2006년도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편으로 여전히 우리 근현대시를 공부하고 가르쳤지만, 실제로 이보다 더 마음과 시간을 바친 것은 동양 경전과 사상,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음양오행론과 불교의 세계였다. 특별히 불교의 세계는 내가 공부했던 경전과 사상들을 회통시키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고, 젊은 시절 내가 한동안 교회당에 드나들며 의지했던 기독교의 세계까지도 함께 아우르도록 하였다. 나는 이런 나의 관심과 공부를 결합시켜보고자 몇 권의 책(『한국 현대시와 평인(平人)의 사상』, 『일심(一心)의 시학 도심(道心)의 미학』 등)을 써보기도 하였다. 작년에,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다녔던 새로운 시론의 개요가 만들어졌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전편 다시 읽기』를 출간하고 난 이후였다. 이 개요를 작성하면서 묘한 전율을 느꼈다. 내 안에서 무르익어 솟아오르는 틈 없는 세계가 손에 쥐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동안 서양의 근현대시론과 우리 시학계의 근현대시론 앞에서 느꼈던 소외감, 결핍감 등을 얼마간 털어낼 수 있는 기쁨이 찾아온 것이었다. 이번에 내놓는 시론은 불교를 통하여 우주와 삶과 시를 같이 읽어본 글들이다. 그것은 우주와 삶과 시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며 이들을 한 몸으로 이해하고 체득하지 않는다면 시 공부도, 삶을 사는 것도, 이 우주 안에 몸을 두는 일도 ‘분리’가 주는 소외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주와 삶과 시, 이 세 가지가 한 몸으로 움직이는 묘용을 보고 느낄 때 우주 속에서 삶과 시가, 삶 속에서 우주와 시가, 시 속에서 우주와 삶이 살아 움직이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책을 모두 4부로 구성하였다. 제1부인 「시심불심(詩心佛心)」은 시심이 곧 불심임을 드러내고자 한 일반론이다. 그리고 제2부인 「시경심경(詩經心經)」은 불교 경전 가운데서도 에센스에 해당하는 『반야심경』을 주종으로 삼아 글을 이끌어가되 『법화경』과 『화엄경』을 포함시켜 시경이 심경임을 설명해보고자 한 특별론이다. 또한 제3부인 「시상심상(詩想心想)」은 그동안 근현대시론들이 시의 구성요소나 특징들로 언급해온 것들을 중심으로 삼아 시의 주요한 요소들을 불교적으로 새롭게 해석해본 각론이다. 이어서 제4부인 「시인평인(詩人平人)」은 불교와 더불어 음양오행론을 적용하여 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주변의 화제와 문제들에 대하여 사유해본 테마론이다. 책의 제목을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이라고 붙였다. 인류 지혜사의 스승이자 삶의 도반인 붓다에 의지하여 그와 함께 가는 길을 기록해보고 싶었다. 나는 아직 불교적 지식도, 불교적 수행도 부족하기 그지없다. 겨우 붓다가 가리키는 길을 보고 있을 뿐, 몸과 마음의 발걸음은 어린아이의 걸음마처럼 위태롭다. 그렇더라도 그 방향을 바라보며 위태로운 걸음마 속에서 어눌한 말이라도 펼쳐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이 글을 쓰게 하였다. 우리 시학계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1908년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부터 시작하여 지난 2008년에 10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고 그 이후의 시간을 경영해가고 있는 우리 근현대 시단과 시사가 새로운 성찰과 모색을 시도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 시단과 시사는 앞으로 열어 나아가야 할 길을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사막 수업 82장

나는 오랫동안 내 무의식의 깊은 곳에 애호의 감정을 넘어서서 신성한 실재(divine reality)의 세계로 자리했던 사막을 불러내어 그에 의지하고 그와 만나면서 허덕이던 나 자신을 본래 자리로 귀가시키며 다독였다. 더 이상 욕망하거나 기대할 것이 없는 평평한 자리에서 오직 초연하게만 존재하는 사막을 통하여 나는 일체의 내외적 비만함과 불순물, 불안함과 혼란스러움, 낯설음과 이물감, 분노심과 자괴감 등을 털어버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나를 속박하는 일체의 허상을 허상으로 알아 그것들을 그들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는 동안 본래 자리가 깨어나기를 기대하였다. 사막이라는 신성한 실재의 한 상징이자 세계와 만나는 일은 여기에 직입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사막 수업 82장』을 쓰게 되었다. 여기서 82장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의 물결을 따라가며 글을 쓰다 보니 이곳에서 마침표가 찍히며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고요해졌다. 위와 같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사막과의 만남은 내 삶과 글쓰기의 단호한 언사를 담고 있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또 그런 글을 써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이어진 나의 삶과 글쓰기의 여정을 놓고 볼 때 사막을 대면하고 쓴 이번의 글은 조금 과장한다면 ‘결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막과의 이번 만남은 내가 그동안 사막에 진 오래된 빚을 이제야 제대로 갚은 기분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간 애면글면하면서 살아온 삶과 글쓰기의 한 매듭을 여기서 맺어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막 수업 82장』을 통하여 나와 그대가,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본래 자리로 귀가하여 참마음의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혼란스럽고 혼탁하고 위태롭기 그지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인간 진화사의 새 장면을 발전적으로 열어가는 새 흐름의 앞선 순례객이자 도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 읽는 기쁨

시인이라고 하면 저 서양에나 훌륭한 시인이 있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현대 시단에는 교과서의 위엄과 관계없이 좋은 시인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현대 시단에는 대중성이 떨어진다 해도 문제적인 세계를 지닌 좋은 시인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현대 시단에는 서양의 시인들 못지않게 우수한 시인들이 적잖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시작품을 통해 알리고 싶은 것이 이 책을 출간하게 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시 읽는 기쁨 2

시인이라고 하면 저 서양에나 훌륭한 시인이 있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현대 시단에는 교과서의 위엄과 관계없이 좋은 시인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현대 시단에는 대중성이 떨어진다 해도 문제적인 세계를 지닌 좋은 시인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현대 시단에는 서양의 시인들 못지않게 우수한 시인들이 적잖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시작품을 통해 알리고 싶은 것이 이 책을 출간하게 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시 읽는 기쁨 3

시인이라고 하면 저 서양에나 훌륭한 시인이 있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현대 시단에는 교과서의 위엄과 관계없이 좋은 시인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현대 시단에는 대중성이 떨어진다 해도 문제적인 세계를 지닌 좋은 시인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현대 시단에는 서양의 시인들 못지않게 우수한 시인들이 적잖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시작품을 통해 알리고 싶은 것이 이 책을 출간하게 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신 월인천강지곡

지난해 말, 시론집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을 출간하고 ‘선시 읽기’를 하려던 참에 그만 시를 쓰는 데로 저도 모르게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몇 편의 시를 습작 노트에 써보던 학생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를 다시 쓸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붓이 가리키는 대로 좇아가다 보니 한 달간에 90여 편의 시가 완성되어 시집 한 권의 분량이 되었습니다.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불교 공부에 심취한 동안, 붓다의 말씀을 제 삶 속에서 읽어두었던 것들이 나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시는 ‘붓다와 함께 쓴 시’입니다. 저는 시인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시가 찾아오면 시를 쓸 수도 있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시집을 통하여 ‘월인(月印)의 기쁨’, ‘심인(心印)의 기쁨’, ‘법인(法印)의 기쁨’, ‘여래(如來)의 기쁨’, ‘진리(眞理)의 기쁨’과 조금 가까이 만나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집의 제목을 ‘신(新)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라고 붙인 데는 위와 같은 소망이 들어 있습니다.

파라미타의 행복

파라미타는 산스크리트어 ‘p?ramit?’를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로 표기한 것이다. 본래 산스크리트어 ‘p?ramit?’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문화권으로 들어올 때, 이 말은 ‘바라밀다(波羅蜜多)’ 혹은 ‘바라밀(波羅蜜)’이라고 소리에 기대어 음사되었다. 파라미타, 다시 말하여 바라밀다는 그 뜻이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이 언덕이 범속한 중생심에 지배되는 현상세계라면 저 언덕은 지혜심과 자비심, 보리심과 보살심이 작용하는 본원 세계이다. 그렇다고 하여 ‘건너간다’는 것을 물리적인 ‘건너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제자리에서 그대로 마음을 달리하여 ‘건너감’을 이룩하고 ‘저 언덕’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이 언덕과 저 언덕을 오고 가며 뒤뚱거린다. 저 언덕을 제아무리 꿈꾸고 지향해도 이 언덕의 오래된 관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중력권을 벗어나는 일만큼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절망하고 포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저 언덕을 알고, 그리워하고, 지향하고, 바라보는 만큼 우리의 생애는 들어 올려지고 가꾸어진다. 저 언덕으로 가는 길은 한때의 열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한때의 열정은 고사하고 한 생애의 일로도 크게 진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한 만큼 저 언덕으로 길을 낼 수 있고, 그런 만큼 본처(本處)의 식구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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