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은 외롭다고 한다. 외로움을 찾아 지닌다고 한다. 나는 진인도 뭣도 아니지만 그 말뜻을 깊이 새길 수는 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혼자만의 싸움. 나를 혹사시키는 혼자가 좋다. 외로움이 좋다. 캄캄한 우주에서 해도, 달도, 나도 혼자다.
혼자만의 나를 탕진하고 돌아오니 광이 텅 비어 넓어 보이는 공복이 좋다. 그래, 나는 비로소 나와 작별할 수 있겠구나.
돌이켜보면 나는 손창섭 선생과 우에노 여사에게 최소한이나마 인간적인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호적은 누구에게 올라 있는지, 우에노 여사마저 세상을 뜨고 나면 인세는 누가 받게 되는지 등등 사소하지만 한 작가의 생애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질문을 나는 차마 꺼내지 못했다. 자칫 우에노 여사에게 생채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우에노 여사도 자신의 과거를 미화시킬지언정, 내게 진실만을 들려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치부를 감추는 건 본능이다.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과연 나는 손창섭을 만난 것일까, 아니면 우에노 여사를 만난 것일까, 하는 의아심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기자로 문단을 출입한 지 어느덧 12년 세월이다. 돌이켜보면 문학은 가당치 않은 틈입자인 나를 거덜냈다. 내가 만난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상처를 문학적 원천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광기와 독기를 뿜어냈다. 반경 백 미터 내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원폭적 광기와 독기. 그들의 속모를 눈동자에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들어야 했으니 여기 수록된 글들은 한 시절의 속기록에 가깝다.
그들은 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지리멸렬을 견디기 위해 창작에의 충동을 가슴에 품은 채 스스로를 풀무질하고 있는 방화범이 그들이었다. 그 불에 덴 사람은 그들 자신이었다. 내가 만난 작가나 시인들은 자신 안의 불길로 타다 남은 잿더미 속에서 스스로를 건져 올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몇 번이고 인생을 뒤집던 불우의 전력을 문장의 저력으로 환원시킨 광인이었다. 문체의 힘은 그 뒤집어짐에서 나왔던 것이다. 스스로를 재탄생시키려는 몸부림이 뒤집어짐이었다. 무엇인가에 들리게 되면 문장은 부력을 갖고 중력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들은 허공에 떠오르려는 공중부양의 유혹을 가까스로 참고 지상에 남아있는 깃털들이었다.
10년 전 미당 서정주 선생을 월담해 대면한 이래 나는 내내 문학의 담장에 걸린 초승달의 심정이었다. 미당의 매섭고도 촉촉한 시선이 잊히지 않는다. 어두운 거실 저편에서 뭔가 마성에 서려 있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시인은 이제 질마재의 귀신이 되었다. 헤아려보니 내가 만났던 문인 가운데 세상을 떠난 이들이 적지 않다. 이미 노경(老境)에 이르렀던 탓도 있겠지만 세월을 견디지 못하는 게 또한 문학이라는 생각에 새삼 무상해진다.
그동안 문단의 주역들이 물러나고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했다. 이 자연스런 교체야말로 문학의 무한한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문인이기 전에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한 인간이었다. 마치 오래 전에 헤어졌던 사람처럼 낯설어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할 때쯤 운명의 꽃인 그 헤어진 사람과도 같은 문학을 마땅히 만나기 위해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그 만남의 풍경 자체가 문학의 본질일 것이다.
그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도지곤 했던 화평한 슬픔 땜에 난 술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문학은 비어 있고 문학에는 벽이 없다. 문학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열 수 없는 비밀의 문과도 같다. 그 문을 여는 열쇠가 이 책 어딘가에 숨어 있기를. 문학이여, 문학인이여, 언제나처럼 둥근 침묵으로 이 어두운 시대를 견디시라.
나는 이민자는 아니지만 어쩌다가 심정적 이민자가 되었다. 비록 한 나라에 붙박여 살고 있지만, 이 시대에 조국이나 모국, 혹은 모국어에 대한 개념은 매우 느슨하다. 차라리 어느 후미진 선술집, 성에 낀 유리창의 낙서들이 더 조국처럼 느껴진다. 여기 묶인 시편들은 그 유리창에 쓴 순간적인 감흥에 가깝다. 쓰자마자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문자의 환희 혹은 존재들의 혼절.
결말이 불확실한 긴 여정 끝에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살고 있는 혼혈의 사촌누이 릴리의 손을 쥐었을 때의 감동은 잊을 수 없다. 릴리를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3월 싱가포르 창이공항 입국장이었다. 그때는 소연방이었던 카자흐스탄과 국교 수립 이전이어서 제3국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해야 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이튿날 창이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전광판에 소련 국적 아에로플로트의 도착을 알리는 불이 깜박였고 처음 보는 중부仲父가 아버지에게 다가와 얼굴을 만지며 부둥켜안았다.
피부를 통해서라도 서로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접촉의 마법 뒤에 혼혈의 처녀가 파란 눈을 말똥거리며 서 있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여러 차례 알마티를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내 곁엔 릴리가 있었다. 나는 릴리를 통해 혼혈과 이주, 망명과 불귀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시집을 릴리와 릴리를 닮은 혼혈의 후손들에게 바친다.
초고를 쓰는 데는 두 달 남짓이었다. 2011년 여름과 가을 사이. 나는 다른 시간대로 번져들고 있었다. 미래로는 갈 수 없되 과거로는 얼마든지 번져들 수 있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을 주었던 게 분명하다. 이상한 일은 내가 살아온 시간에 타인의 시간이 섞이면서 과거가 재구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나섰는데 결과적으로 타인이 되어 살고 있는 나를 만난 격이다. ‘낯선 나’의 정체는 소설 속 소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 자신이면서 타인, 타인이면서 나 자신인 소년은 전존재가 되어 과거 속에 살고 있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과거로 유랑한다. 지난 9월, 나는 만주 일대를 다녀왔지만 만주에서 돌아온 내가 있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내가 있다. 삶이 계속될수록 유랑도 계속되고 낯선 타국, 낯선 거리에 버려두고 온 내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소년이 과거에서 정지 상태였다면 그것은 외부의 힘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외부의 힘이 가해질 경우 소년은 다시 유랑을 계속하게 된다. 문학이란 정지된 시간에 힘을 가해 운동성을 부여하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독일 작가 W. G. 제발트(1944∼2001)의 장편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역시 정지된 시간에 운동성을 부여한 작품이다. 소설엔 네 살 때 혼자 영국으로 보내진 프라하 출신 유대 소년이 등장한다. 제발트가 시간의 저편에 빛바랜 듯 남아 있는 역사의 심층을 오늘의 시간 위에 불쑥 올려놓았듯 나 역시 잃어버렸던 역사의 한 장면을 복원하고 싶었다. 소설의 첫 문장을 『아우스터리츠』의 첫 문장에서 따온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1990년대 모스크바 유학 시절에 찾아다니던 아르히프의 비밀해제문서에서 막 튀어나와 숨 쉬던 소년. 나는 소년을 떠올리며 시를 끼적이기도 했다.
모든 복은 당신께
타슈켄트 촐수 호텔 앞에서 어깨를 스치고 사라진 당신
곰삭은 젓갈 냄새를 풍기던 당신은 아랄 해의 늙은 뱃사람이었다
한번 나가면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돌아오지 않는 출항
우즈베크인 선장이 흔들어대는 뱃전의 종소리를 들으며
당신은 어깨에 그물을 짊어졌던 것이다
어촌계 게시판에 압정으로 박힌 전보엔 단 두 줄
1937년 11월 극동 조선인 728가구 아랄 해 도착
거주지가 전무하므로 확보된 모든 천막을 투입할 것
그날 이후 당신은 지상의 복을 찾아 헤매는 어린 어부였으며
그물을 끌어올리거나 생선을 궤짝에 주워 담던 더벅머리 소년이었다
당신은 사마르칸트에도 부하라에도 있었다
다락방에도 계단참에도 복도에도 호텔 앞 부랑자 무리 속에도 당신은 있었다
때때로 현관문을 열고 나서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몽당 빗자루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생기듯
신의 뜻으로 당신의 실체가 숨어 있다 해도
그 마음으로 우리는 어깨를 스쳤던 것이다
자오선도 타버릴 것 같은 아랄 해에서
당신이 평생 그물질로 건져낸 것은 오직 태양
뜨거운 철선 위에서 보면 태양도 녹슬고 있었다
발바닥이 벌겋게 익어가는 철선 위에서
그물코에 찢긴 손가락을 잘라내야 했을 때
당신은 붉은 초승달에 코란을 걸어놓고 기도했다
-바다가 다 증발해버렸으면
그렇게 당신은 늙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
고향을 만들기 위해 자식을 낳았다 해도
무참하고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버렸어야 했다
피를 끊었어야 했다
뼈아픈 후회로 인해 당신에게서 짠 냄새가 나는 것이다
이제 늙은 당신
당신이 파란 눈의 손자가 갖고 놀던 실 꾸러미에 발목이 감긴 채
좁다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져 임종을 맞는다 해도
당신은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
살아온 자취가 실타래처럼 당신 발목을 감은 것이니
아랄 해가 당신의 저주를 받아 사라지고 있다 해도
당신은 아랄 해의 또다른 현현이어서 언제나 바다 냄새를 풍긴다
오래전 타슈켄트에서 땟국물 도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이 곁을 스쳐가며 눈매를 번뜩였을 때 사막의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가 소설을 견인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시를 쓴 게 2011년 봄이었으니, 나는 시 한 편을 써놓고 소년이 내게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소년과 마찬가지로 소설 속 블라디미르 교수 역시 실존 인물이다. 그는 내 지도교수였으며 2010년 말 모스크바에서 별세했다. 이래저래 20년 만에 꺼내든 유학 시절의 비밀해제문서엔 나와 토론을 벌이던 그의 필적이 남아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하여 만약 역사라는 거인에게 남은 복이 있다면 비밀해제문서에서 튀어나온 불귀의 존재인 소년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다. 모든 복은 소년에게!
내게 뭔가 들이닥친 걸까요. 지나간다, 는 말에 문제 있습니까.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 한 명 한 명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집니다. 우연과 필연으로 타오르는 운명의 폭탄 말이죠. 어디서 왔는지는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 또한 아무도 모릅니다. 시간이 앞으로만 진행하는 한, 우리는 모두 지나갈 뿐입니다. 단 한 번 살기에 세상이, 혹은 시간이 볼 수 있게 피를 묻히는 것이겠죠. 나는 그것을 언어의 피, 시의 피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뭔가 들이닥친 걸까요. 지나간다, 는 말에 문제 있습니까.
2014년 봄
실컷 울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누구에게 버림받아 뼈에 사무친 슬픔도 없었던 것 같다. 한번쯤 절실한 울음을 터뜨려도 좋을 텐데. 속시원히 울지 못하는 나의 울음이 저주스러울 뿐이다. 까맣게 타버린 심장으로부터 터져나와 등줄기와 늑골을 흔들어대는 울음을 나는 기다렸는지 모른다.
내 혈육은 남과 북, 그리고 중앙아의 어두운 거리에서 오늘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 이 땅의 모든 헤어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살다 살다 믿음 없는 얼굴이었다. 흐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 시를 쓴 주체는 내가 아니라 역사에 흩뿌려져 부유하는, 어두운 뒷모습의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역사마저도 하얀 뼈가 드러날 때까지 삭혀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지상을 살아가면서 가끔 세상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만큼 내 자신이 미궁일 때가 많다. 쑤라에 대해 썼음에도 미궁은 해결되기는 커녕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작별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그대 쑤라여. 혁명도 사랑도 다 지난 일이 되어버린 이 지상에 강으로 누워 있는 그대의 풍경은 얼마나 위대하고 멋진가. 그 풍경에 매료되어 한 시절을 보낸 이 불가항력의 글쓰기 역시 그 강에 빈 배 하나를 띄우는 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몸을 접는 기술을 오래전 『난쏘공』에서 읽고 생판 남의 일로만 생각해오다가 이 시편들이 넉 달 만에 몰아 터져 나오면서 내 몸도 저절로 접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어를 접는다는 것. 욕망을 접는다는 것. 슬픔도, 삶도 접을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내가 나를 처음으로 시인이라고 수긍하는 게 있었다.
2022년 팔월
이 소설은 북한 사회주의 정권 수립 시기에 이미 현실 사회주의의 목표에서 멀어져간 스탈린식 독재 체제에 염증을 느껴 조국을 등져야 했던 한 지식인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뒤틀린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꿈과 이상을 압착당한 채 망명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물의 노마드적 궤적을 통해 국가와 개인, 그리고 역사와 개인 간의 존립적 모순을 어느 만큼이나마 형상화시켰다면 지난 이 년의 집필 기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혼이 배회하는 땅의 참혹에 관해 쓰고자 했다. 연옥이 내게 속삭이듯 분노로 가득 찬 무엇인가가 땅에서 꿈틀거렸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땅은 인간을 대신해 구원을 갈구하며 오래 울었다. 그리고 강이 있었다. 나는 강이 내 안으로 흘러들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