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내려놓아야 할 나이에 잔불 살리듯 공을 들인 아홉 편의 중·단편소설을 모아 생애 마지막 소설집을 묶는다.
앞쪽 세 편의 짧은 소설은 영원한 청년 작가 김유정과 내 인생의 큰 바위 얼굴 황순원 선생님에 대한 오마주로, 그들을 기리는 일에 나름의 열정을 다했다는 자부쯤으로 읽히지 않을까 싶다.
「오래된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와 「집을 떠나 집에 가다」 등 두 편의 작품은 기존의 관심거리였던 그 정체나 현상이 괴이쩍은 실종 혹은 죽음에 대한 실존성 더듬기와 맥 을 같이한다.
중편 「굿」과 그 앞에 묶인 세 편의 단편은 1963년 등단작 「동행」을 비롯한 분단 관련 작품들이 그러하듯 현재진행형인 한국전쟁의 악령, 오늘까지도 불신과 증오의 천형을 사는 사람들의 절규, 그 울분을 모티프로 한 이야기들이다.
글 쓰는 일이 즐거웠다. 전업 작가의 길을 걷지 못한 그 열 없음을 감추기라도 하듯 글 쓰는 일에 미쳤을 터이다. 그것은 남들과 다른 시각에서 나만의 문법으로 세상을 재단해 독자 의 몫을 남긴다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능청과 긴장의 소설 미학, 그 창의의 마음 떨림 같은 것. 특히 한껏 가려 쓰는 이 낱말들이 서사의 진정성은 물론 작품의 완성도와 무관치 않다는 장인 정신, 곧 우리말 우리글 사랑의 그 신명이 내 글쓰기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 신명의 흔적을 뒤적이는 독자들의 얼굴에 떠오를 웃음을 기대한다.
2023년 6월
춘천 금병산 자락에서
전상국
“「출향」 「술래 눈뜨다」 「이산」 「이류 속에서」 「허허벌판」 「산 넘어 강」 등 여섯 편의 중단편소설을 모은 연작소설 『길』 과 중편소설 「외등」 을 한데 묶어 ‘중단편소설 전집 6’을 낸다.
연작소설 『길』은 해방 직전에서부터 6・25 전쟁에 의해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유년 및 청소년기 화자의 눈을 통해 그려낸 가족사라 할 수 있다. 당대, 그 모든 책임이 근원과 지향성을 잃은 아버지 탓이라는, 부권상실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은 작의가 너무 분명해서일까. 작품의 미학적 가치 구현에 조금 소홀했다는 반성도 크다. 그것은 정치꾼으로 전락한 그 시대 아버지들에 대한 불신의 늪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길』이 성장소설의 문턱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캐릭터보다는 과거 역사 복원으로서의 소명 같은 것, 곧 그 시대 사회 혼란의 디테일 묘사에 집착한 때문일 터이다.
현실을 넘어서는 허구는 없다. 이쯤에서 연작소설 『길』이 장편에 미치지 못한 미완의 작품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이런! 분단으로 인한 실향 혹은 이산의 상처 치유로서의 대안이 될 좀 볼륨 있는 마지막 작품을 구상하고 있을 때 그 일이 터진 것이다.
1963년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방영이었다. 회심의 작품 구상이 한 방에 날아갔다. 작가의 상상과 허구가 현실의 적나라한 대하드라마, 그 감동의 물결 앞에 의기소침, 온전히 글쓰기의 신명을 잃은 것이다. 다행히 이미 발표한 연작 다섯 편이 중단편소설로서의 독립적 형상화에 모자람이 없다는 자부로 작품 미완의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중편 「외등」은 연작 『길』보다 조금 앞서 발표한 작품으로 시대 배경이 같아 어쩌면 『길』의 마무리 이야기가 이런 것이어도 괜찮겠다 싶어 한데 묶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별개의 독립된 작품으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외등」은 남과 북이 그러하듯 불신과 증오로 맞서는 두 마을을 배경으로, 그 갈등 해소에 마땅한 공직자상을 생각한 작품이다. 아울러 『길』 연작이 그러했듯 실종된 아버지의 탈을 쓴 그 시대의 파렴치한 정치꾼들에 대한 썩 안 좋은 생각이 작품 깊숙이 깔려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_‘작가의 말’에서
김유정을 사랑하고 그를 기리는 강원도의 일곱 후배 작가의「봄?봄」이어쓰기 작업이 이 시대 독자들에게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구조로써의 소설 미학 그 매력 찾기이며, 어느 시대나 좋은 소설은 그 작품을 제대로 읽는 독자들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시대 일곱 작가가 보여 준 상상력 부리기와 그 표현의 마력 확인이 소설 읽기의 재미, 또 다른 즐거움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작품으로 본새 있게 보여 줘야 할 생각들을 그동안 너무 드레가 없이 풀고 살았다는 반성을 하면서 이 책을 묶는다. 그러나 등단 42년 동안 나름의 열정을 쏟아 부으며 걸어온 내 문학의 길 위에서 이삭줍듯 편편이 정리한 글들이라 작가 의식 및 작품 이해의 낌새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도 있겠다는 자위가 없지 않다.
그런대로의 위안은 내게 글쓰기의 신명을 처음으로 안겨준 등단 작품 <동행>을 독자들 앞에 새로이 선보일 수 있었음이다. '동행'이란 낱말을 통해 발상한 '함께 갈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가야 하는' 이야기를 구상할 때의 그 흥분이 첫 작품집을 만드는 그 순간까지도 어금니에 자글자글 씹혔다. 특히 <동행>에 처음 쓴 웃음소리 ㅎㅎ,ㅎㅎㅎ 등 나름의 의성, 의태어 구사를 통한 소설 언어실험이야말로 내 글쓰기의 또 다른 즐거움으로 자리하게 된 일이다.
“「사이코 시대」 등 『중단편소설 전집 8』에 함께 묶은 작품들은 불신과 증오, 소외와 좌절, 억압과 굴복 등 광기의 모태를 리트머스 시험지 삼아 80년대 말 우리네의 자화상을 사회 병리학적으로 진단한, 이른바 ‘사이코’ 연작에 해당한다.
그 시절 작가로서 내가 즐겨 다룬 광기는 성공하지 못한 악의 한 유형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때로 필요악이란 말로 그 광기를 미화하기도 했다. 부패와 권태 혹은 맹목적 이념보다는 광기가 한결 창의적이요 인간적이란 생각에서였다.
어쩌면 그 광기는 이제까지 내 작품의 주요 모티브였던 6·25적 악령이 조금 더 디테일한 모습으로 현현된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분단으로 인한 동질의 이질화 혹은 그 정체성의 파괴가 낳은 그늘 속에서 6·25 악령이 숨 쉬고 있었던 것처럼 그 시대의 광기는 물질의 풍요가 불러온 정신의 피폐와 희극화한 정치 상황이 낳은 말세적 징후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가끔 치미는, 글쓰기에 대한 부정의 정신도 이 연작의 형상화에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사이코’ 연작을 쓰는 동안 세상을 보는 뒤틀린 심사만큼이나 내가 벌이는 글 쓰는 행위에 대해서도 냉소적이었다. 글 쓰는 신명, 그 불길이 꺼질 조짐, 그런 두려움까지.”
9년만에 묶어내는 중.단편집이다. 원래 과작 체질이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탐한 탓이다. 갈피도 잡을 수 없는 일에 열정을 쏟아내다 문득 돌아보았을 때 거기 어디에도 내가 없었다. 허망. 그럴 때 구원처럼 글쓰기에 매달리곤 했지만 무뎌진 감각 되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대로의 자위는 두꺼운 외투를 벗어버리고 가뿐한 차림으로 나서고 싶은 충동의 수용이다. 시류와의 타협이 아니라 가둬뒀던 물이 넘쳐 새로이 길 하나를 만드는 즐거움. '6.25적 악령' 또는 성공하지 못한 악의 한 유형인 '사이코'의 광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매듭짓기, <온 생애의 한순간>을 묶어내는 일로 내 문학의 집에 이르는 작은 이정표 하나라도 보였으면 좋겠다.
이 책은 모든 연장을 다 갖춘 뒤 그 나무를 현장에서 제품으로 만들겠다는 자신을 가지고 희희낙락 산을 오르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쓰지 않았다. 아직은 맨손이지만 그 산에 오르기만 하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의 밭을 찾아낼 것만 같은 그런 예감의 끌림을 가진 이들을 위한 그 산길 안내의 역할을 하기 위해 쓰였다.
그러나 어느 날 좁은 문이 열리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동안 소설이 아닌 네댓 권의 산문집을 독자들 앞에 내놓으면서 가졌던 짐짐한 마음이 이번 산문집 『춘천 사는 이야기』를 준비하는 과정에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것은 소설이라는 허구의 진실 찾기 놀이에 취해 건성으로 지나쳐 버린 현실 속의 나의 참모습은 어떠할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답이 이제까지 내가 쓴 잡문 류의 글 속에 들어 있음을 알았다. 그들 글 속에서 내가 주장하고 설득하려는 당위명제들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지침이며 그렇게 살지 못한 나를 준엄하게 꾸짖는 자성의 목소리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을 포함한 모든 글들은 내가 나한테 거는 주술과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신명나는 글쓰기든 그것이 아니든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글들이 내가 그처럼 소중히 끌어안고 산 소설 쓰기 그 즐거움의 뒤안길에 수줍게 숨어 있던 내 자신의 참모습이었다는 일깨움이다.
쥐꼬리도 꼬리라는 위안. 고로 나는 내가 이제까지 남긴 내 글만큼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