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실존을 정면에서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여기 이런 실존 앞에서의 다섯 개의 비극적인 혹은 희극적인 패배, 다섯 개의 삶이 있다. 곧 총살을 당할 파블로는 실존의 저편으로 자신의 생각을 내던지고 죽음을 생각하지만 실패한다. 에브는 광기의 비현실적이고 닫힌 세계 속에서 피에르와 결합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것은 가식의 세계이며 광인은 거짓말쟁이다.
에로스트라트는 인간 조건에 대한 눈부신 거부인 범죄로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범죄는 이미 이루어졌고 존재하지만 에로스트라트는 그 사실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피가 흘러나오는 거대한 오물 상자이다. 륄뤼는 자신을 속인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시선 사이에 가벼운 안개를 스며들게 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안개는 즉시 투명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속이지 못한다. 그저 속인다고 믿을 뿐이다.
뤼시앵 플뢰리에는 자신이 존재한다고 느낄 찰나에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원치 않으며 도피한다. 그는 자신의 권리에 대한 명상 속으로 피신한다. 왜냐하면 권리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실패한다. 이 모든 도피는 벽에 막힌다. 실존으로부터 도피하는 것, 그것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실존이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충만이다. (1939년 판 <벽>의 서문)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는 생활양식, 사회적 기능, 구체적인 문제의 극단적인 다양화라는 특징을 띠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서 인간과 사회라는 보편 개념은 결과적으로 불가능한 개념이 되고 말았는데도, 지식인은 이 불가능한 보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식인이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라는 이 비난은 사실 맞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