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필이란 몸과 이어진, 또 다른 제 힘의 한 모습이리라. 그동안 나는 컴퓨터 워드 작업에만 의존, 생각이 바로 활자화되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 젊은 시절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돋도록 연필 또는 볼펜에 힘을 주어 써댔던 글들. 다시 육필을 써보면서 잃어버린 내 몸과 정신의 한 수공업적 각인을 새삼 느낀다, 나의 졸필과 거친 필세는 여전히 어쩔 수 없다는 자괴감과 함께.
1989년에 낸 시집을 새로 읽는다. 쑥스러워지면서 수줍어진다. 왜 나는 ‘안’과 ‘밖’을 저렇게 구분지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기실 그 구분이 잘 안 되는 세계 속에 나는 빠져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을-. 그런 가운데 나는 나의 그늘마저 새로 보려고 쓰다듬고, 행간을 비춰보며 더 보려고 애쓸 뿐이다, 여전히 한 눈은 감고 외눈을 뜬 채-.
2023년 6월 - 개정판 시인의 말
오래, 흠모했다. 이 서사는 그 그리움의 정이 맺힌 말이다. 기껍지 않은가, 이 만남은? 그를 통해 내 속 꿈틀대는 질문과 대답으로 흐르는 길을 느낀다. 그 느낌들을 말로 드러냈으니, 나도 천상 길 위의 사람. 그래, 우린 늘 길 위에서 정을 나누는 존재들. 내 그리움은 그리움이 덧나고, 그는 오늘도 나를 흘러간다. 달빛 가득한 홍수여.
최동호 선생이 사행 시집을 내잔다. 사행시라. 우리가 언제부터 사행시를 엿보았지? 어쨌든 사행시를 만들면서, 형식이나 장르의 굴레에 굳이 묶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행시라는 말 대신 ‘짧은 시’로 쓴다. 시조로 쓴 게 시부지기 넉 줄이 되기도 해서 맞은 것들도 있다. 재미있넹.
그래, 짧은 시는 꿈이다. 가장 긴 시의 꿈이기도 하다. 짧아서 먼 응시도 있다. 눈이 먼 시는 아니다. 또렷한 시선이 한결 너를 드러낸다.
2024년 5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