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있다. 인간 경험의 극한 속에서조차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은 저자에게 무한 존경심을 느끼면서도 살짝 반감이 들기도 한다. 저자의 최대치의 체험에 비하면 우리가 나날의 곤궁한 일상 속에서 겪는 희로애락은 얼마나 사치한 것인가? 매 순간 죽음에 직면한 저자는 말한다. 인류에게 사랑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고! 극한 상황 속에서 행하는 사랑은 인간 존엄을 증명한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 자문해 볼 일이다.
잘 늙는 일이 쉽지 않다. 질풍노도와 같은 청년처럼 벅차다. 그저 나이만 먹으면 되는 줄 알았다. 지혜로운 어른으로 여유를 만끽하며 살 줄 알았다. 욕망을 비우고 허허롭게 관조하며 살 줄 알았다. 아니었다. 오래된 귤처럼 즙이 빠져나간 거죽은 딱딱한 채 몸체는 오그라드는데도 욕망은 구멍처럼 팔수록 커지고 그런 욕망이 징그러워 애써 저만큼 밀어내면 이번엔 권태의 오랏줄이 영혼을 칭칭 감아 왔다. 잘 늙는다는 것, 고산을 쉬지 않고 오르는 일처럼 고된 일이다. 지금의 나는 젊은 날의 내가 그리던 내가 아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기 자랑, 자기선전에 몰두하느라 여념이 없는 노인뿐, 어른다운 지혜와 겸손이 없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틀이 바뀌지 않는 사람은 동일한 삶의 패턴, 동일한 생의 궤도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발견과 새로운 인식을 통한 삶과 생의 개진은 언어의 틀을 바꾼다. 문자 행위를 업으로 삼는 이들이 변신을 꿈꿔야 하고 이를 실행에 옮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새 내게 새롭게 생긴 버릇이 있다. 오가다 우연하게 마주치는 온갖 사물들을 애정하는 것이다. 햇빛도 아까워 일부러 손 뻗어 만져 보기도 하고 강물을 한참 동안 무연히 굽어보기도 하고 철마다 피는 꽃들을 찾아가 살뜰하게 살펴보기도 하고 바람을 있는 힘껏 마셔 보기도 하는 것이다. 심상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새삼스레 귀하게 다가오는 것은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징조이리라. 어찌 보는 일뿐이랴, 소리, 냄새, 촉감까지도 예사롭지가 않다. 세상을 떠나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저것들을 나는 친애하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의 가치가 높고 깊다. 사물이여, 나의 애인들이여, 열애의 하루가 짧기만 하도다.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갈림길에는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문이 나란히 서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다시 읽으며 우주에 대한 상상에 젖곤 한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나무와 인류의 조상이 같다’라는 대목을 읽고 난 뒤로 산책 중에 만나는 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내 생의 근원인 광활한 우주 속으로 흘러들 것이다. 지구는 우주에서 나온 우리가 잠시 지나가는 여정에 불과한 한 지점일 뿐이다. 여정 속에서 숱한 인연들이 고리를 맺고 풀면서 내 곁을 스쳐 지나갔거나 지나는 중이다.
내 사후의 산책로인 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 저 먼 곳에 내가 영원히 안식을 취할 집이 있도다. 나는 지금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
서문을 대신하여
―무소의 뿔처럼
삶에 의미가 없을수록 자유로울 수 있다
헛된 희망을 갖지 말라
희망은 구속이고 감옥이다
구원에의 기대도 갖지 말라
벼랑에 부서지는 파도에
동요하지 않는 바다처럼
살든 죽든
슬프거나 기쁘거나 아프거나
세계는 관심도 애정도 없고
악의도 없다
선과 악에 결정을 내리지 않으며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혼돈스럽고 냉혹하다
개체에 무정한 실재
완벽한 혼자이고 우주적 고아일 뿐인
우리는 현재에 충실하며
(그렇다고 내재적 필연성만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근현대 시사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자산인 서정의 전통성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내화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진화하는 건강한 서정’입니다. 재래 문법에 안주한 고답적 서정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창조적 서정을 계속하여 선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의 기계적 조화가 아니라 긴장하고 갈등하는, 기우뚱한 조화와 균형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월을 승계하는 일이며 살리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난여름 나는 LA에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길에서 데스밸리를 보게 되었다. 서반구에서 고도가 가장 낮고 여름 기온이 섭씨 58.3도까지 올라간 적이 있으며 여행자와 동물이 쓰러져 죽기도 한다는 데스밸리에서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시원始原을 보았다. 인간 문명의 허위와 가식이 침범할 수 없는 원초적 순수 생명의 세계. 그곳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내 지난날의 습기 많은 생生을 묻었다. 데스밸리에서 나는 죽은 것이다.
한 편의 시가 인간의 타락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숲을 빠져나온 청량한 바람이 속진에 찌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맑게 하듯이 서늘하고도 투명한 시의 바람 혹은 시의 물결이 나날의 곤고한 일상을 잠시나마 위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지 않겠는가.
성경의 말씀처럼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출구 없는 자본의 거대한 감옥에서 수인처럼 강제된 삶을 살아갈망정 그 안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와 품위와 자존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돈 되지 않으나 순정한 것임에 분명한 것에도 더러 관심의 촉수를 뻗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 읽기라고 감히 나는 말해본다.
선집에 부쳐
자본의 위력은 실로 막강하다. 자본은 그에게 적대적인 것들조차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 마르크스나 체 게바라조차도 상품이 되어 저잣거리에서 팔리고 있는 현실을 보라. 자본의 파시즘 앞에서는 신성한 종교조차도 타락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념이 사라진 시대에 들어앉은 거만한 자본의 가공할 폭력이 전 지구를 들끓게 하고 있다. 국가·지역·단체·계급·개인 간의 갈등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자본이라는 흉물이 자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자본의 시대에 시가 읽히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누가 돈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외려 돈 버는 데 장애가 되는 시에 관심과 애정을 보이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전일적 자본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관철하는 시대에도 비록 예외적 소수일망정 아직도 시를 읽고 쓰는 시대의 지진아들이 있다.
한 편의 시가 인간의 타락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숲을 빠져나온 청량한 바람이 속진에 찌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맑게 하듯이 서늘하고도 투명한 시의 바람 혹은 잔잔한 시의 물결이 나날의 곤고한 일상을 잠시나마 위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지 않겠는가.
성경의 말씀처럼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출구 없는 자본의 거대한 감옥에서 수인처럼 강제된 삶을 살아갈망정 그 안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와 품위와 자존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돈 되지 않으나 순정한 것임에 분명한 것에도 더러 관심의 촉수를 뻗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 읽기라고 감히 나는 말해 본다.
이 책에 실린 시편들은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선자에 의해 소개된 것들로서 읽는 이로 하여금 우리에게 생활 속 발견의 미학과 생각의 계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이 시편들이 시난고난 힘 부쳐 살아가는 독자 제위에게 심심한 격려와 위로가 되길 바란다.
―시인 이재무
쉼표로 살고 싶다. 마침표처럼 확신에 차 단정 짓지 않고 쉼표처럼 망설이고 주저하며 살고 싶다. 수식어 다음에 찍혀 쉼표 다음에 오는 첫 번째 체언을 꾸미지 않고 그 뒤에 오는 체언을 꾸미어주듯 삶의 길 에돌아가고 싶다. 산길 오를 때처럼 돌아서, 돌아서 가는 지혜를 살고 싶다. 지난날 나는 쉼표를 생략하거나 쉼표 없는 문장을 선호하며 살았다. 답이 없는 문장을 경멸하였다. 주장이나 의견이 없는 진술을 답답해하고 조소하였다. 나 이제 쉼표처럼 가쁜 숨결 쉬게 하고 가만, 가만히 세계를 음미하며 살고 싶다. 쉼표가 되어 질주를 멈추고 너라는 체언을 돋보이며 살고 싶다.
최근 내 시편들은 주로 길 위에서 구한 것들이 많다. 이것은 직업과 상관성이 없지 않다. 나는 정규직이 아닌 관계로 하루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 그렇다 보니 시상 역시도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처음에 그것은 이미지로 오기도 하고 은유로 오기도 한다. 나는 나를 찾아온 이 귀한 손님들을 고이 데려와 컴퓨터 속에 모셔놓는다. 청탁이 오면 예의 손님들을 정성껏 성장시킨 뒤 잡지사에 시집보낸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시편들이 내 최근작들이다.
시를 삼십 년 넘게 써왔지만 나는 여전히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 매번 시를 쓸 때마다 처음인 듯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 때문에 어떤 강박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시와 잘 놀기만을 바랄 뿐이다.
시는 내 생활의 기록이다. 내 시편들은 생활 속에서 발견한 것들이다. 나는 굳이 신기하거나 생경한 것에서 시를 구하지 않는다. 생활에서 구한 대상들에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뿐이다.
내 손을 떠난 시편들은 더 이상 내 소유물이 아니다. 나를 떠난 시편들이 보다 많은 이들과 접촉하길 바란다. 세상을 활기차게 주유하길 바란다. 시여! 그러면 안녕!
나는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무엇보다 그것을 이겨낼 방편으로 걷는 일에 몰두하였다. 나는 걸으면서 깜냥껏 살아온 내 과거와 해후하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앞당겨 만나보기도 한다. 걸으면서 노변의 억센 수염처럼 돋아난 풀과 도열한 나무들과 서해를 향해 완만하게 걸어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자주 형상을 바꾸며 떠도는, 하늘 정원의 구름들을 올려다보고 또 오가는 행인들의 각기 다른 몸짓들과 표정들을 읽기도 하고 한가하게 낚싯대를 드리운, 시간을 초월한 강태공들의 여유를 쳐다보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또 큰비가 온 다음 날은 길가에 생겨난 웅덩이 앞에 앉아, 물거울을 다녀가며 화장을 고치기도 하고 마른 목을 축이기도 하는 온갖 사물들 예컨대 떠도는 구름, 언덕의 나뭇가지, 꽁지 짧은 새 등등을 훔쳐보기도 한다.
1983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니 올해로 시력 35년이 됩니다. 시의 인생이 어느덧 청년기를 거쳐 중년기에 접어든 셈이지요. 깜냥껏 달려온 셈이지만 아직도 중후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풋내 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 나이 올해로 예순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가까운 문우들이 물심양면 수고해준 덕으로 이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만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내게 시 쓰는 일은 고통이면서 구원이었습니다. 고통만 계속되었다면 이 일을 지금까지 나는 지속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돌아보니 참 많은 이들에게 빚지며 살아왔습니다. 오늘의 나는, 나를 다녀간 무수한 인연들의 음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새삼,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립니다.
삶의 보폭과 시의 보폭이 나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8년 2월 시인 이재무
1983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니 올해로 시력 35년이 됩니다. 시의 인생이 어느덧 청년기를 거쳐 중년기에 접어든 셈이지요. 깜냥껏 달려온 셈이지만 아직도 중후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풋내 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 나이 올해로 예순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가까운 문우들이 물심양면 수고해준 덕으로 이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만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내게 시 쓰는 일은 고통이면서 구원이었습니다. 고통만 계속되었다면 이 일을 지금까지 나는 지속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돌아보니 참 많은 이들에게 빚지며 살아왔습니다. 오늘의 나는, 나를 다녀간 무수한 인연들의 음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새삼,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립니다.
삶의 보폭과 시의 보폭이 나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8년 2월
한강변으로 이사온 지 이년이 넘었다. 조석으로 고수부지에 나가 완만한 보폭으로 서해를 향해 흐르는 한강을 따라 걷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자연 자주, 두서없이 물에 대한 사념에 사로잡히곤 했다.
스크럼을 짜 흐르는 저, 한 물결은 기실 각기 태생이 다른 것들의, 의지가 결여된 연대일 것이다. 탁한 물결 속에서 나는 더러 불운한 상경파들이 오체투지로 써가는 자전들을 읽기도 한다. 가까운 미래에 바다 앞에서 강물은 몇번을 망설이고 부정하다가 이윽고 체념한 듯 순응하여 바다의 일부가 되리라. 그러니 여생은 자세를 한껏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가야 한다.
한파에 묶여 있는 플라스틱 오리배들 곁으로 청둥오리 가족이 한가롭게 유영을 즐기고 있다. 오리배는 현실이고 청둥오리는 이상이다. 오리배와 청둥오리 사이에서의 길항과 반목과 주저와 회의를 기록해온 것이 내 시가 아니었을까? 이것 때문에 내 시의 표정이 다소 우울하고 어두운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1983년 지상에 첫 시를 선보인 이후 24년 동안 시를 써왔지만 내게 있어 시의 정체나 본질은 아직 요령부득이다. 삶에 특별한 전문가가 없듯이 예술행위 또한 각별한 비법이 있을 수 없다. 시는 내게 구원이면서 고통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즐거운 형벌에 만족한다.
내가 써온 지리멸렬한 시편들은 거의 대개가, 비록 그 용량이 협소하나 생활의 터전에서 발견한 것들이다. '생활의 발견'이야말로 지금까지 그래왔듯 내 시가 끝까지 견지하여야 할 지적 목록이자 재산이다. 하지만 갈수록 흐려지는 시력이 그것을 충분히 감당할는지...
나의 슬픔, 나의 노래
기억을 통한 이야기 방식은 불가능한 현존의 드라마를 마침내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설득력 높은 방식이고, 그 때문에 우리는 그 방식 속에서 ‘거듭 그리고 완전히 살기’를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문광훈, 『가면들의 병기창-발터 벤야민의 문제의식』
십 년 전 여의도에 살던 때였다. 나는 여느 날처럼 겨울 이른 아침 집을 나와 한강을 거닐다가 여의나루역을 향했다. 매서운 강바람이 옷섶을 파고 들어와 살(肉)을 아프게 헤집어댔다. 대중가요 〈유정천리〉를 입 밖으로 뱉어 내었다(나는 혼자 걸을 때 흘러간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다). 한강 변에는 지나는 행인이 없었다.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2절 중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 노랫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올 때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는 엉엉 웃으면서 지하철역을 향해 발걸음을 놀렸다. 노래가 끝나면 다시 불렀다. 강바람이 춥지 않고 시원했다.
나는 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왈칵, 울음을 쏟아 냈을까? 무심결에 입 밖으로 흘러나온 노랫말이, 그때까지 시난고난 살아온 편력을 순간적으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물론 이 행위는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무의식의 발로였다. 살다 보면 이렇듯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자신을 흘리고 생의 전라全裸와 치부를 가감 없이 노출시키는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무조건적인 생의 낭비나 소모만은 아니다. 때에 따라 누적된 감정은 배설을 필요로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들은 대개가 어릴 적 엄니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생활에서 장애를 겪을 때마다 엄니에게서 배운 노래를 부르는 게 버릇이 되어 버렸다. 어릴 적 농사 채가 많지 않았던 우리 집은 담배 농사를 지어 곤궁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참으로 품이 많이 드는 농사였다. 담뱃잎은 탄저병에 취약하여 잎 사이사이 붉은 반점이 생겼는데 그것들을 가위로 잘라 내고 황금색 담뱃잎만을 추려 가지런히 해야 했다. 이것을 ‘담배 조리’라 하였다. 담배 농사는 아부지의 몫이었지만 담배 조리는 엄니와 동네 처녀들의 몫이었다. 하품이 잦은 오후 시간대가 되면 라디오에서 뽕짝의 구성진 가락이 흘러나오곤 하였는데 엄니와 처녀들은 누가 질세라 그 유행하는 노래들을 따라 부르면서 일이 주는 과중한 피로를 달래곤 하였다. 가수들이 불러대는 노래들은 나 같은 어린이가 듣기에도 어찌나 서럽고 청승맞고 구슬픈지 까닭 없이 가슴이 먹먹해지곤 하였다.
나의 시 쓰기는 군 제대 후 복학생이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문자 행위로서의 시 쓰기가 아닌 생활로서의 시 쓰기는 이미 그 어린 시절 엄니와 처녀들이 떼창으로 부르던 노래들을 따라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절 가락에 실린 노랫말의 청승과 서러움은 고스란히 유전자처럼 내 시의 정서로 전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