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적인 전통고수) (현실주의, 현장주의) (서정과 현실의 조화) (휴머니즘, 뉴 휴머니즘) 아 어지러운 방황이여. 내 누옥에 잠시 들리신 뮤즈여, 나는 진실로 그대를 사랑했으나 사랑하는 방법에는 너무나 서툴렀음을 고백합니다. 반세기의 내 습작을 마음껏 꾸짖어주시고 새로운 개안의 길을 열어주소서.
시는 시인이 스스로 못다 그린 자화상이 있어서 자신을 태워 그리는 그림이라고 작품으로 노래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처럼 아프게, 진지하게, 절실하게 썼으면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작품의 행로를 예측해서 산문으로 쓴 적도 있다. 이제 단시조를 쓰리라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모든 작품을 단시조로 쓸 수는 없었다. 포즈를 위한 멋내기 시조, 작품을 위한 작품, 요설적인 것, 수사가 요란스러운 것을 다 제거하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은 다 독자가 판단할 뿐 내 스스로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아직도 내가 선택한 시조에 무언가를 담고 한없이 설렐 수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대견스럽다.
인생도 저녁 무렵이다. 그러나 변함없이 쓰리라.
간추리고 정리하는 일에는 언제나 반성적 성찰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바라보면 목마르고 고통스런 경험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일 또한 필요한 일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오로지 한 곳을 향해 걸어온 내 자신을 신뢰하고 싶다. 스스로 골라낸 이 작품들이 나를 증명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2024년 8월 이우걸
비가 내리고 있다. 우포에 짐을 옮기고 난 후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좋은 일이 찾아오리라 생각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아프고 약간은 우울하기도 하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리는 빗방울들을 세고 있다. 아주 옛날에도 결정적인 순간엔 늘 비가 왔다. 나는 비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비는 내게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곁에 둔 작품들을 다시 엮는 이 시도는 오래된 연서를 다시 꺼내 보이는 것 같이 계면쩍지만 한편으론 잊었던 나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즐겁기도 하다. 나는 이런 음색으로 그대에게 편지를 띄워왔구나 하는 자각이 황혼의 길섶을 적신다.
구상나무, 노각나무, 풍나무 잎들이 빗방울을 달고 나를 본다. 아직 사랑으로 열고 가야할 길이 있으므로 저 초록의 말씀을 내 것으로 하여 가지려 한다.
2016년 7월 우포에서
현대시조가 출발한 지 어언 백여 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시조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에 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선에서 시대의식과 서정성의 조화를 통해 좋은 시조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시조시인들의 우수한 작품을 널리 읽을 수 있는 지면을 마련하는 것이 아직도 필요하다고 필자는 느껴왔다.
그런 가운데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에서 〈현대시조 산책〉이란 이름으로 2000년대 이후에 등단한 시조시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기회를 가졌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연재물을 엮은 것이다. 시조시단의 위치에서 보면 비교적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대의 중요한 시조시인들의 작품을 다 소개하진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시인들에게 미안한 마음 전한다. 나의 우둔함과 게으름 탓이다. 아울러 이 책이 널리 읽혀져서 현대시조의 오늘을 이해하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흔쾌히 이 책을 내준 시인동네, 그리고 이 글을 연재해준 류미야 시인 그리고 늘 나의 글을 정리해주는 임성구, 정희경 시인에게 빚진 마음 여기 기록해놓고 싶다.
2019년 8월
이우걸